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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2호 2023년 5월] 기고 에세이

초코파이 50년, 신화창조의 비밀

동문기고

초코파이 50년, 신화창조의 비밀




김용찬
농화학57-61
전 배화여대 교수
오리온 동문회장


보릿고개 겪으며 간편식 개발 다짐
미 연수때 마시멜로 아이디어 얻어
개발 초기엔 짤순이까지 동원해
한국 넘어 세계인 사랑 받아 보람


인생이 짧든 길든 간에, 특히 100세 시대에서 평생 살아가는 동안에 우리 사회에 어떤 뚜렷한 족적을 남긴다는 것은 정말 바람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 속담에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말이 있듯이, 오늘날 국내외를 불문하고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초코파이’를 개발해서 입맛을 즐겁게 하는 기록을 남길 수 있었다는 것이 자랑스러울 수 있지 않을까 생각돼, 지금으로부터 50년 전(1973년) 개발되었던 ‘오리온 초코파이’에 대해 소개하고자 한다.

‘간편식’에 대한 절실한 필요성을 느낀 것은 6·25전쟁이 끝난 1955년 경, 고1 때 고향 보령 대천에서 봤던 한 참혹한 모습때문이었다. 3년 간의 전쟁 때문에 농사를 제대로 못 지어, 보릿고개를 보내며 굶주림을 참지 못하던 터에 길가에 버려진 먹음직한 ‘복어 알’을 요리해 먹고, 그 맹독으로 죽어가는 청년을 두 사람이 부축해가며 ‘졸면 안 된다’고 소리치는 장면을 2번씩이나 애타게 바라봤다. ‘내가 대학에 들어가면 이런 허기진 사람들이 쉽게 사 먹을 수 있는 간편식을 책임지고 만들어 내리라’는 다짐을 했던 것이 ‘초코파이’ 개발의 시작이 아니었나 기억된다.

사실상, 한동안 잊었던 이 기억이 되살아 나도록 한 것은 대학 졸업반 시절, 경기중학교에 꼭 입학시키고 싶다는 간절한 한 부모의 요청에 따라 국민학교 6년생의 가정교사를 맡아 가르칠 때다. 시끄러운 소리에 밖을 내다 보니, 공교롭게도 박하사탕 등 캔디 제품을 생산하는 가내 과자공장 사장의 집임을 알게 된 것이다. 그때부터 과자에 대해 큰 관심을 갖게 되었고, 졸업 후 입대해 36개월의 만기제대 한달 전, 마지막 휴가를 나왔을 때, 오리온 생산부장으로 근무하던 서울대 선배 한 분을 만나게 되면서 구체화됐다. ‘도와달라’는 선배의 요청에 따라 제대 즉시, 이양구 회장을 면접차 만나 뵙고, ‘오리온에 뼈를 묻으라’는 당부 말씀을 들으며, 1964년에 오리온 제과에 입사하게 되었던 것이 ‘초코파이’ 개발의 꿈을 실현하는 시발점이 된 것이라 생각된다.

오리온 입사 후 군대에 ‘비상식’으로 납품되었던 건빵의 품질개선 및 고급 비스킷, 캔디, 초콜릿, 껌, 웨하스 등 다양한 제품들을 개발, 생산하면서 과장, 부장, 상무, 전무, 부사장(삼화식품) 등을 거치며 30년 가까이 근무하다, 말년에 대학 교수로서 약 13년간 봉직하며 정년 퇴직하게 되었던 것이다.

특기할 것은 오리온에서 개발 실장으로 근무할 당시, 미국 국무성(AID) 의뢰에 의한 한국식품공업협회의 미국유학 선발 시험에 해태제과 개발연구소 소장과 함께 합격하여, 1972년부터 1973년까지 FDA, 미국의 유명 식품산업체, 대학 등에서 기술 연수를 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미국 체류 당시 주말이면, 베이커리, 대소형 식품점, 식품 시장 등을 주로 찾아가, 과자 제품의 다양성을 조사하고, 제품 아이디어를 구상하게 되었다. 당시 마시멜로 제품이 특히 많음에 놀랐고, 한국 시장에 적용 가능한지 고심하게 되었다.

미국을 비롯한 서양사람들은 평소 고기를 주식으로 하기 때문에 비교적 치아가 튼튼하고, 또 껌까지 더 질긴 것을 좋아함에도 불구하고 어찌하여 조직이 말랑말랑한 마시멜로를 즐기는 것인지 궁금했다. 모양과 색깔의 화려함과 다양성 때문일까?
그때 의문이 풀리지는 않았지만, 우리 제품에도 적용할 필요가 있음을 강하게 느꼈다. 그래서 비교적 단단한 비스킷과 맛을 더욱 돋구어 주는 초콜릿 코팅이라면 조직감 면에서 조화를 이룰 수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미국에 체류하는 동안 크래커로 유명한 나비스코 비스킷 공장, 네슬레 초콜릿 공장, 허쉬 초콜릿 공장, 아우고스터 비스킷 공장, 스낵 및 아이스크림 공장 등 30여 공장을 방문, 연수하면서, 현재 많은 나라에서 인기있는 ‘초코파이’의 배합표까지 작성하게 되고, 귀국 후 개발할 것을 결심하게 되었다.

실제 개발 초기에는 제작 기구들이 전무한 상황에서 짤순이로 시작하여 목수를 시켜 족탑기까지 제작하고, 베이스 케이크를 만든 다음, ‘초코파이’를 시험 생산하기에 어려움이 많았다. 하지만 시장 반응을 체크하기 위해 마켓 테스트를 한 결과, 기록적이고, 획기적인 판매 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었다. 뜨거운 시장 호응에 따라 생산 기계를 발주케 되었고, 본격적인 생산에 돌입하기까지는 약 1년의 시간이 필요했다.

이렇게 어렵게 개발, 생산된 ‘초코파이’가 시장에서 폭발적인 환영을 받으면서, 그 동안 잘 판매되지 않았던 다른 제품까지 줄사탕처럼 줄줄이 판매되는 획기적인 효과를 나타내게 되었다.

특히 2000년대에 회사별로 ‘대히트한 제품’에 대한 소개로 인기를 끌었던 KBS TV 프로그램, ‘신화창조의 비밀’에서 필자의 집까지 찾아와, 본인 소개와 함께 ‘초코파이’가 2002년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전야에 ‘대히트 제품’으로 방영되면서 많은 선후배들로부터 축하를 받았고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리고 오늘날에는 중국, 러시아, 베트남, 태국, 인도 등 해외 10여 개 공장에서 2조원이 넘는 ‘초코파이’가 생산, 공급됨으로써, 한국인은 물론 전 세계에서 남여노소 불문하고 무척 좋아하는 ‘초코파이’ 전성시대를 누리고 있다. 수출 면에서도 아주 큰 기여를 하고 있음에 가슴 뿌듯하다.

지금은 폐쇄된 상태지만, 개성공단 내 많은 공장에서 생산목표가 초과 달성되었을 때 ‘초코파이’를 격려 표시용 보너스로 지급했다고 한다. 처음에는 각자 맛을 보았지만, 나중에는 북한 종업원들 간에 ‘초코파이 계’를 만들어, 모아서 비싸게 판매함으로써 가정 경제에도 보탬이 되도록 했다는 이야기, 지프를 몰고 휴전선을 넘어 탈북한 북한 운전병이 총상 수술 후, 마취에서 깨어나자마자 ‘초코파이’가 먹고 싶다는 이야기 등은 우리를 충분히 흥분케 했다. 또한 외국에서 결혼 답례품으로 사용되기도 한다는 소식도 우리를 기쁘게 하였다.

특히 대학 교수 시절, 한 학기가 끝나는 마지막 시간에는 쫑파티라 해서, ‘초코파이’나 캐러멜을 나누어 주며 아쉬움을 달래는 시간을 갖게 되기도 했는데, 아주 즐거워 하며 나에게 ‘초코파이 박사’란 닉네임을 붙여주며 학생들이 좋아했던 추억이 그립기도 하다.

앞으로도 ‘초코파이’가 계속해서 소비자들에게 인기를 누리며, 우유 또는 커피와 함께 먹으면 한끼 식사로서도 충분하다는 사실을 알고, 즐기며 행복한 시간을 가질 수 있기를 간곡히 기원해 본다. “초코파이여, 영원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