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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3호 2023년 6월] 기고 에세이

택시운전사 수입이 의사보다 많은 나라

김학훈 (지리교육75-81) 전 청주대 교수
동문기고

택시운전사 수입이 의사보다 많은 나라
 
 
김학훈 
지리교육75-81
전 청주대 교수
 
사회기반 부실한 쿠바 사회주의
전직 공학자가 노점 차리기도  


최근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쿠바와 카메라맨’을 시청했다. 2019년 쿠바의 수도 아바나를 다녀온 경험이 있어서 감회가 새롭게 느껴졌다. 이 다큐멘터리는 미국의 카메라맨, 존 앨버트 감독이 1970년대 초부터 2016년까지 약 40여 년에 걸쳐 촬영한 비디오 동영상을 쿠바의 세 가정을 중심으로 시대순으로 보여준다.

영상은 카스트로가 타계한 2016년 11월 27일경 추모 분위기의 쿠바 아바나 거리 모습으로 시작하지만, 곧 카메라맨이 처음 촬영을 시작한 1970년대 초의 모습을 보여준다. 1959년 공산주의 혁명에 성공한 피델 카스트로는 집권 초기에는 무료배급, 무료의료, 무료교육을 실천하며 프롤레타리아 서민들의 지지를 받았다. 각 가정에서는 부모 세대가 받지 못한 교육 혜택을 자녀들은 누릴 것이라는 희망에 부풀었다. 반면 부르주아 계층은 조국 쿠바를 떠나 미국행을 모색한다. 그러자 카스트로는 호기 있게 떠나고 싶은 사람은 떠나라고 공언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혁명 이후 10여 년이 지난 1970년대부터 쿠바 공산당이 서민들의 기본 욕구를 충족할 수 없다는 것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사탕수수(설탕, 럼주, 폴리코사놀의 원료)와 담배 농사 이외에 산업 기반이 거의 없는 쿠바는 대부분의 공산품과 식량을 소련과 동유럽국가의 원조에 의존하였으며, 차츰 생필품이 부족하게 되어 무료배급이 원활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급기야 1991년의 소련 해체로 인하여 원조물자와 공산품이 더 이상 들어오지 않게 되자, 무료배급이 거의 불가능해졌으며 많은 국민이 굶주리고 암시장에 의존하게 되었다. 일주일 식량 배급은 1인당 쌀 1kg과 설탕 1kg이 전부였고, 그 외 부식은 거의 공급이 되지 않았다. 교육환경은 열악하여 교실은 부족하고 기술교육이나 대학교육을 받아도 일자리가 없었다. 학생들은 학교 교육보다 끼니를 해결하기 위한 일용직 일거리를 찾아 헤매고, 마약이나 잎담배(시가)의 암시장에 빠져들었다. 병원시설은 1950년대 수준에서 더는 개선되지 않았고, 의약품 부족으로 환자치료에 한계가 있었으며, 저임금을 받는 의사들은 의욕을 잃었다. 

결국 쿠바 정부는 1990년대부터 관광시장을 개방하여 주로 미국에서 오는 관광객들을 상대로 한 관광 수입에 크게 의존하게 되었으며, 심지어 미국으로 망명한 쿠바인들의 방문도 환영하고 있다. 실제로 쿠바계 미국인들이 쿠바의 가족에게 보내는 송금과 고향에 와서 쓰는 돈은 쿠바 경제의 주요 수입원이 되고 있다. 길거리에는 전직 공무원이나 공학자였던 사람들이 더 많은 소득을 얻기 위해서 관광객 상대의 기념품 노점을 운영하고 있으며, 관광객을 상대하는 택시 운전사의 수입은 쿠바 의사들의 봉급보다 많았다. 



쿠바 수도 아바나의 클래식카 관광택시.


필자는 2019년 2월에 여행사의 관광패키지로 쿠바의 수도 아바나에 2박 3일간 머물렀는데, 짧은 기간 동안 공산국가 쿠바에 대해 느낀 점이 많다. 우리 일행의 관광 가이드는 알도라는 이름의 40대 흑인이었다. 그는 다양한 경력을 가지고 있었는데, 20대에는 기술직 공무원으로서 체코의 화력발전소에 파견되어 6년간 연수 과정을 거쳤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귀국령이 떨어져서 쿠바에 돌아왔더니 정부에서는 외교부로 발령을 내고 체코어 문서를 번역하는 일을 시켰다고 한다. 이로써 그가 체코에서 배워온 화력발전 기술은 사장하게 되었다. 약 2년 간 번역 일을 하며 무료하게 보내던 차에 쿠바 외교부에서는 북한에 가서 한국어를 배워올 지원자를 모집했다고 한다. 알도는 단조로운 쿠바 생활을 벗어나서 동아시아의 중국, 일본 등지를 여행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를 하고 지원했다. 마침 쿠바에서도 북한은 가난하고 폐쇄적이라고 알려져 있어서 북한에 가고 싶다는 사람이 나서지 않았기 때문에, 혼자 지원하여 북한으로 갈 수 있었다고 한다. 

알도는 평양의 김일성 대학에서 4년을 지냈다고 하는데, 필자가 그곳 생활에 관해서 물어보니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는 대학 기숙사에 체류하며 주중에는 강의실과 도서관 등을 출입하며 캠퍼스를 벗어날 수가 없었고, 일요일은 휴일이었지만 캠퍼스 밖을 나가려면 행선지를 신고해야 했으며, 행선지도 평양을 벗어날 수가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4년 동안 북한에 있으면서 평양 바깥을 나가보지 못했고, 다만 공무를 겸해서 중국 베이징에 한 번 다녀온 것이 북한에 체류하면서 경험한 여행의 전부라고 했다. 

알도는 평양에서 쿠바로 귀환한 후에 다시 외교부에서 근무를 시작했는데, 차츰 한국에서도 단체 관광객들이 많이 들어오고 한국어 가이드가 필요해지자 공무원직을 사직하고 가이드로 전업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그 이유는 물론 관광객 상대 가이드의 수입은 공무원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높기 때문이며, 또한 쿠바에서 한국어로 안내할 수 있는 사람이 몇 명 안 되기 때문에 희소가치도 있었다. 알도에 의하면 쿠바인 중에서 한국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은 약 10명 정도인데 대부분이 가이드 일에 종사한다고 한다.

아바나 시내 관광 중 하나는 1950년대 미제 클래식카 택시를 타고 구시가지와 해변도로를 한 바퀴 도는 것인데, 외관은 무개차(無蓋車)로서 클래식카답게 우아한 모습이지만, 엔진이 낡아서 소음과 매연이 심했다. 이렇게 관광객을 상대하는 택시들은 시내 대기오염의 주범이었으며, 게다가 항구 근처 화력발전소의 굴뚝에서 내뿜는 시커먼 연기도 대기오염을 가중하고 있었다. 
전력 수급은 지금도 사정이 안 좋아서 관광객들이 많이 다니는 구시가지와 호텔 인근의 상가들도 일부 술집이나 식당을 제외하면 해지기 전인 오후 6시경에 문을 닫는다. 가로등은 중심 대로에만 켜있고 이면도로는 어두컴컴했다. 이면도로에서는 일부 주택에서 켠 전등에 의지해서 어두운 길을 다닐 수 있었다. 야간에 저녁 식사를 위해 단체로 방문한 레스토랑은 사전에 가이드가 예약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도착할 때까지 현관 전등을 꺼두고 있다가 우리가 도착하자 전등을 밝혔다. 레스토랑 주변도 어두컴컴했으며, 단체 관광객이 없으면 레스토랑도 열지 않을 만큼 행인들이 없었다. 쿠바 재즈로 유명한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Buena Vista Social Club)이나 살사 댄스 공연으로 유명한 아바나 클럽(Habana Club) 같은 명소도 주변의 거리는 어두컴컴하고 관광객 외에는 거의 왕래가 없었다. 

관광지 상가에서 만난 쿠바인이나 공연을 하는 사람들 외에 주택가 행인들의 모습에서는 희망이 없는 빈곤한 생활에 지친 그림자를 쉽게 볼 수 있었다. 일자리를 창출하는 산업이 부족하고 식량배급도 원활하지 못한 나라에서 무료로 제공하는 저급한 교육시설과 의료시설 같은 사회복지 혜택은 큰 의미가 없다. 한때 카스트로의 동료였던 체 게바라가 원했던 사회는 이런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허울 좋은 무상제공 사회복지에 기반한 공산주의 국가들은 경제발전을 통해 분배를 확대할 수 있는 사회 기반이 결여되어 있다. 쿠바와 같이 공산당이 지배하는 북한은 쿠바보다 훨씬 폐쇄적이기 때문에 주민 생활이 쿠바보다 더 비참할 것으로 짐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