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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3호 2020년 12월] 기고 에세이

유종해 연세대 명예교수 기고

자유의 여신상 얼굴 모델은 누굴까
자유의 여신상 얼굴 모델은 누굴까

동문 기고
유종해 (법학50-54) 연세대 명예교수


미국에서 가장 가보고 싶은 도시가 어디냐고 물으면 일반적으로 뉴욕이 제일이고 그 다음이 보스톤, 그리고 워싱턴DC 순이라고 한다. 뉴욕은 인구도 가장 많고 미국을 상징하는 기념물들이 많기 때문에 외국인들이 가장 가보고 싶은 도시가 되지  않았나  싶다.

필자도 1964년 1월에 미국 미시간대에 유학을 갔는데, 1965년 봄에 ASPA(American Society of Public Association) 연차 학술대회가 뉴욕에서 열려 방문한 경험이 있다.

미시간 앤아버(Ann Arbor)에서 뉴욕은 500마일 정도 거리다. 앤아버에서 6시에 출발해 그 다음날 아침 6시 경에 뉴욕에 들어섰다. 펜실베이니아 턴파이크 고속도로 위 달리는 차창에서 미국과 뉴욕을 상징하는 자유의 여신상이 아침 햇살에 비치는 것을 보고 감격의 눈물을 흘린 일이 지금도 생생하다. 자유의 여신상은 뉴욕항 입구에 있는 리버티 섬에 세워졌기 때문에, 수없이 많은 유럽 이민자들이 길고 고생스러운 항해 끝에 자유의 여신상을 보고 ‘이제 살았다’며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는 글을  본  일이 있다. 

미국을 상징하는 자유의 여신상은 다음과 같은 스토리가 있다. 자유의 여신상의 이름은 ‘세계에 빛을 비추는 횃불을 든 자유의 신상’이다. 높이는 46m지만 그 밑의 기단까지 포함하면 무려 92m에 이른다.

발밑에는 노예해방을 뜻하는 부서진 족쇄가 놓여 있다. 오른손에는 횃불을 높이 들고, 왼손에는 ‘1776년 7월 4일’ 날짜가 새겨진 독립선언서를 들고 있다.

19세기 초 프랑스는 미 대륙에 많은 영토를 갖고 있었다. 현재 캐나다의 퀘백도 프랑스 영토였다. 프랑스는 미국 본토의 3분의 1을 차지하는 루이지애나 테리토리를 소유하고 있었다. 기록을 보니 나폴레옹은 카리브해까지 영토를 넓혀 프랑스 제국을 만들려는 꿈을 꾸었는데 두 가지 이유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고 한다.

첫째는 아이티(Haiti)를 손에 넣지 못했고, 두 번째는 당시 미 제퍼슨 대통령이 친불인사라서 1803년 1,500만 달러(아크 당 3달러)에 역사적인 ‘루이지애나 매각’(Louisiana Purchase)이 나폴레옹과 제퍼슨 사이에 맺어졌다.



이 덕분에 미국은 당시 영토를 2배로 넓힐 수 있었다. 미국과 프랑스의 친선관계가 더욱 돈독해져 1886년 프랑스가 자유의 여신상을 기증하기에 이르렀다.

프랑스는 미국의 독립 100주년 기념품을 미국에 기증하기 위해 프랑스 조각가 ‘프레데리크 오귀스트 바르톨디’에게 자유의 여신상 제작을 의뢰했다. 바르톨디는 작품을 시작할 때 걱정이 있었다. 여신상의 얼굴 모델로 누구를 해야할지 고민이 컸던 것. 여러 유명한 사람들이 물망에 올랐다. 아름다운 여배우, 유명 정치가, 재벌 등 사회적으로 성취를 이룬 사람들의 모습이 추천됐다. 하지만 바르톨디는 자유를 생각하고 수호하는 자애로운 여신의 얼굴을 조각하고 싶었다.

‘세상에서 가장 자애로운 얼굴은 어디에 있을까’. 결국 바르톨디는 고심 끝에 자신을 낳아 길러주신 어머니를 모델로 삼기로 했다. 바르톨디에게 세상에서 가장 자애로운 얼굴은 바로 어머니의 얼굴이었던 것이다.

제작 과정에서 연로하신 어머니가 오래도록 같은 포즈를 취하는 데 힘들어 하자 어머니를 닮은 여자를 모델로 구해 작업하게 됐고 모든 작업이 끝난 후 바르톨디는 그녀와 결혼을 했다.

자녀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산 부모들은 세월과 상황에 상관없이 내면에서 뿜어지는 자애로움이 항상 존재한다. 필자의 어머니는 중학교 5학년(지금의 고2) 때 세상을 떠나셨다. 어머니의 피부며 한쪽 눈이 작은 것까지 닮아, 자유의 여신상을 조각한 바르톨디의 착상이 좋았다고 가슴으로 동감해 조각한 과정의 일부를 소개한 것이다.

‘아름다운 것은 참답고, 참다운 것은 아름답다’는 존 키츠의 말도 생동감 있게 다가온다.

미국은 프랑스가 우호적으로 기증한 이 기념 여신상을 리버티 섬에 세웠고, 1, 2차 세계대전을 치른 후 팍스 아메리카나(Pax Americana)를 이룩하는 데 이 여신상은 큰 축복을 가져다줬다.

1863년 남북전쟁 후 아브라함 링컨이 민주주의 원리를 선포한 게티즈버그 연설, 1867년 러시아로부터 헐값에 알래스카 구입, 1886년에 자유의 여신상 건립으로 이어지며 미국의 전성기는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자유의 여신상 건립은 미국과 프랑스를 굳게 묶어 주는 큰 일을 했음을 새롭게 알게 돼, 동상이나 기타 비슷한 상의 건립에는 조각가 바르톨디가 했던 연구와 노력이  있어야겠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