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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5호 2022년 10월] 기고 에세이

“살암시민 살아진다”

장동만 칼럼니스트

“살암시민 살아진다”




장동만

철학55-61
칼럼니스트


인터넷 서핑을 하다가 재미있기도 하고, 많은 것을 생각게 하는 제주도 방언이 눈에 띄었다. “살암시민 살아진다.” 제주 어르신들이 흔히 쓰는 말이라고 한다. 표준 말로 옮기면 “살다보면 살아진다”라는데, 내 생각으론 “살다보면…” 보단 “살았으니 살아진다”가 그 본래의 뜻에 더욱 가까울 것 같다.

물속에서 숨이 넘어가는 고통을 참으면서 버티는 해녀들의 고달픈 삶, 뭍에 나와 한숨 돌리며 “내 몸 움직여 밥 지어 먹고, 잠만 잘 수 있으면 ‘살암시민 다 살아진다’”고 푸념을 한다고 한다.

사람 사는 모습을 형언하는 말이 참 많다. 우선 “잘 산다, 못 산다” 돈의 많고 적음, 주로 경제적 측면에서 보는 관점이다. “복받은 삶, 복 없는 삶” 돈 있고, 건강하고, 자손 잘 두고, 부러울 것 없는 복된 삶이다. 그런가 하면 “죽지 못해 산다”는 말도 있다. 그런 복이 없는 사람들의 비관 섞인 자탄이다.

여기서 제주 해녀들의 “살암시민 살아진다” 를 다시 곱씹어 보게 된다. 그렇게 물속에서 죽을 둥 살 둥 생사를 넘나들며 살아가는 삶, 하루 하루 지내다 보니 그래도 세월은 흐르고 나는 그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어떻게 보면 숙명을 즐거이 끌어안는 해녀들의 체념 섞인 삶의 목소리다. 우리에게 무엇인가 암시하는 바가 있을 것 같다.

“살암시민 살아진다”, 여생이 얼마 남지 않은 우리 노년들의 경우에 이 말을 한 번 대입해 보자. ‘살다’는 그 어원이 ‘사르다(불로 태워 없애다)’란다. 무엇을 불태워 없앤다는 말인가? 그 심오한 뜻은 모르겠고, 그냥 상식적으로 해석해 보면 삶의 시간을 정열을 쏟아 불사름으로써 그 무엇(?)을 이룩하는 것, 그것이 곧 ‘산다, 살다’는 뜻이 아닌가 싶다. 그러면 이제 ‘한쪽 발을 무덤에 걸친(One Foot in the Grave)’ 우리 노년들이 시간을 불태울 수 있는 대상이 무엇이 있을 것인가? 그 대상이 없다면 ‘산다, 살다’라고 말할 수도 없지 않은가? 루소는 말한다. “산다는 것은 그저 숨만 쉬는 것이 아니다, 활동하는 것이다 (To live is not to breathe, but to act)”. 우리는 지금 하루 밥 세끼를 먹고 숨을 쉬고 있다. 그런데 활동(action)은? 젊은 세대들이 밥만 축내는 ‘식충 (食蟲) 꼰대’라고 막말을 쏟아내도 반박할 건더기가 있을 것 같지 않다.

고 함석헌 선생님은 ‘겉살림(외면 생활)’, ‘속살림(내면 생활)’을 자주 말씀 하셨다. “사람이란 ‘속살림’을 해야 하느니라” 젊었을 때는 “그렇지, 그렇게 살아야지”, ‘속살림’을 하려 많은 노력을 했다. 그런데 이젠‘겉살림’ 외부 활동도 없고, ‘속살림’ 또한 골이 텅텅 비어 알맹이 없는 ‘속빈 강정’이 되어가니…. 오늘 하루도 “살암시민 살아진다” “숨을 쉬니 살고 있다”를 뇌까리게 된다.


*장 동문은 최근 100편의 ‘장동만의 죽음학 오디세이’를 묶어 ‘살아가며 죽어가며’란 책으로 출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