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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0호 2022년 5월] 기고 에세이

인생에 예술이 필요할 때

정성희 전 동아일보 논설위원·본지 논설위원

인생에 예술이 필요할 때




정성희
국사82-86
전 동아일보 논설위원·본지 논설위원



우리 사회의 복잡다단한 갈등, 인간의 본성과 욕망이 불러오는 비극적 사건 사고들, 권력의 치부를 취재하고 비판하는 일은 중요하고 의미 있는 일이지만 개인적으로 지치는 일이다. 제대로 된 기사나 칼럼 하나 써내고 나면 “영혼이 탈탈 털리는 느낌”이다. 이런 언론인 생활에서 컴컴하고 아득한 방 안에 쏟아지는 한 줄기 햇살 같은 위로를 건넨 것이 음악과 미술 등 예술이었다.

작품 구매는 엄두를 못 내도 미술 관련 서적을 사 보는 것이 평소 취미인데 ‘세기의 기증’이라는 지난해 이건희 컬렉션 기증과 NFT 아트를 계기로 뜨거워진 미술시장을 보면서 어리둥절하고 혼란스러운 느낌을 갖고 있었다. 그러던 중 동창신문 귀퉁이에 자리한 단신 하나에 눈이 멈춰버렸다. 미술 아카데미. 온라인 강의도 아니고 서울 공덕역 SNU장학빌딩까지 왕복 3시간이 걸리는 번거로움이 있지만 나는 무엇에 홀린 듯 수강 신청을 하고 있었다.

총 8회차 수업 중에서 처음 2회는 서울대 박물관장인 미술대 심상용 교수가 맡아주었다. 첫 수업. “수강생이 없으면 어쩌나” 했다던 주최 측의 우려와 달리 제법 넓은 강의실이 다양한 연령대의 수강생들로 꽉 찼다. 학부 때 미술사 수업을 생각하며 아름다운 작품과 작품설명을 해줄 거란 기대는 금방 무너졌다. 심 교수는 “예술이 당면한 상황의 해결에 무슨 도움이 될까”라는 질문으로 강의를 시작했다. 쉬운 말로 “예술이 밥 먹여주냐”는 오랜 화두를 다시 꺼낸 것이다.

그는 대답을 내놓지 않고 알브레히트 뒤러, 장 뒤뷔페, 실비아 모로와 피파 바카, 마크 퀸, 제이크-디노스 채프먼 형제, 패트리샤 피치니니, 그리고 세계 최초의 로봇 화가인 에이다(Ai-Da)를 들고 나왔다. 뒤러는 에덴의 동산에서 추방되는 아담과 이브를 신에게 버림받은 존재가 아니라 아름답고 당당한 모습으로 묘사해 르네상스의 시작을 알렸고 뒤뷔페는 뒤틀리고 기괴한 인물 묘사를 통해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초래한 인간의 합리성에 의문을 던졌다. 당연하게도 로봇 화가를 통해 “창의력은 인간만의 특성인가”를 묻게 된다. 즉 예술은 철학과 시대의 시각적 표현이었다.

그중에서도 내게 가장 큰 인상을 남긴 건 이탈리아의 여성 행위예술가 실비아 모로와 피파 바카였다. 2008년 이들은 “마치 신처럼, 사람들은 자신을 믿어주는 사람에게 믿음으로 보상해 준다”는 신념으로 웨딩드레스를 입고 히치하이킹만으로 밀라노에서 예루살렘까지 대장정을 떠난다. 사소한 갈등으로 도중에 모로와 잠깐 헤어진 피파 바카는 터키에서 강간당한 후 포박된 채 끔찍한 시신으로 발견된다. 세상과 인간에 대한 순진한 믿음 끝. 이걸 확인하는 데 우리는 예술과 희생이 필요했나 보다.

“예술이 밥 먹여주냐”라는 질문으로 돌아가면 요즘 상황만 본다면 예술이 밥을 먹여주는 건 맞는 건 같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예술의 본질은 인간은 밥만으로 살 수 없는 존재임을 보여준다. ‘인생에 예술이 필요해질 때’가 있으며 그때 당신은 외롭고 고통스러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