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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7호 2021년 4월] 뉴스 모교소식

4·19 기념탑을 정문 가까이 옮긴 까닭

서울대와 4·19혁명

오세정 총장을 비롯한 모교 주요 보직교수들과 단과대 학생회장연석회의장 등 학생 대표들이 4월 19일 관악캠퍼스 내 4·19 추모공원을 찾아 4·19혁명 순국 동문들에게 헌화했다.


4·19 기념탑을 정문 가까이 옮긴 까닭

서울대와 4·19혁명

대학생 희생 22명 중 6명이 모교생
공대 뒤쪽에 있던 기념탑 등 모아
2002년 규장각 근처에 추모공원 조성
민주화에 헌신한 젊은 넋 기려


관악캠퍼스 정문을 똑바로 지나 쭉 들어오면 호젓한 길옆으로 4·19 추모공원이 모습을 드러낸다. 문리대와 사범대 등 옛 단과대학 캠퍼스에 흩어져 있던 기념탑과 추모비를 한데 모은 이곳은 한때 다소 외진 공대 인근에 위치했다가 2002년 규장각 근처로 이전해 접근성을 높였다.

오세정 총장이 취임 후 첫 공식 일정으로 찾은 곳이자, 매년 4월 19일 보직 교수와 학생 대표가 함께 기념식을 여는 곳이기도 하다. 역사적·국가적 사건인 4·19혁명이 학교와 동문 차원에서도 중대한 영향을 끼쳤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서울대생 3,000여 명이 참여해 적지 않은 희생자를 낸 만큼 서울대 역사에서 4·19의 의미와 여파는 특별하다.

1960년 3월 15일 이승만 정부의 부정선거 이후 학생 사회의 분노는 들끓었다. 문리대를 중심으로 대규모 학생 시위가 계획 중이던 4월 18일, 고려대생들이 시위 중 폭행을 당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4월 19일을 거사의 날로 잡았다. 당일 모교 학생들은 부정선거 규탄을 외치며 거리로 뛰어나온 각지 학생들과 함께 전진해 갔다. 경무대(지금의 청와대) 앞과 시내 곳곳에서 무차별 사격을 받고 쓰러진 사람들 속엔 모교 학생들도 있었다. 박동훈(당시 법학 1학년), 김치호(수학 3학년), 손중근(국어교육 4학년), 유재식(체육교육 2학년), 고순자(응용미술 3학년), 안승준(경제 3학년) 동문 등 6명이 목숨을 잃었다. 4·19 전체 희생자 중 대학생은 총 22명. 모교 희생자 6명은 수유리 국립4·19민주묘지에 안장됐다.

며칠 후엔 교수들의 시위가 모교를 거점으로 시작됐다. 4월 25일 연건동 의대 교수회관에서 전국 대학교수 258명이 모여 시국선언문을 발표한 것. ‘학생들의 피에 보답하라’ 외치며 거리로 나온 교수들의 모습은 큰 반향을 일으켰다. 다음날 학생과 시민 10만명이 다시 결집해 시위를 벌였고, 결국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 성명을 끌어냈다. 민주주의 역사의 대전환이었다.

모교는 민주화 운동에 목숨 바친 서울대생을 추모하기 위해 4·19 추모공원을 기점으로 한 ‘민주화의 길’을 조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