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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1호 2020년 10월] 기고 에세이

녹두거리에서: 이것이 운명이 아니라면…

김원곤(의학72-78) 모교 의학과 명예교수

이것이 운명이 아니라면…


학창시절 시험을 위한 목적을 제외하고는 외국어에 대한 특별한 관심은 전혀 없었다. 특히 제2외국어의 경우 누구나 가질 수 있는 흘러가는 호기심 이외에는 그 속에 뛰어들 그 어떤 이유도 동기도 없었다. 서울의대 교수에다 위상이 드높은 서울대학병원의 의사라는 안정된 상황에서 근무하면서 영어만 제대로 하면 그것으로 이미 필요하고도 충분한 조건을 갖춘 셈이었다.

그런데 2003년 어느 봄날, 장차 개인적 운명의 전환점이 될 생각 하나가 나비같이 살포시 마음 한 곳에 내려앉았다. ‘이제 우리 나이로 오십이 되었는데 더 늦기 전에 외국어를 하나 더 배워 두면 보람이 있지 않을까?’ 궁리 끝에 결국 일본어를 배우기로 결심하고 그해 6월 학원을 시작으로 첫발을 내디뎠다.

사실상 그것으로 끝이 나야 할 계획이었다. 다른 외국어 공부는 그 어떤 가상 플랜에도 들어 있지 않았다. 그런데 2년 후인 2005년 일본어가 어느 정도 익숙해지자 중국어까지 공부하여 한, 중, 일 3국의 언어를 같이 비교할 수 있었으면 하는 생각을 했고 실제 실행에 옮기고 말았다. 그 이후에도 이미 던져진 운명의 주사위는 관성의 힘으로 두 번 더 굴러갔다. 2006년에는 프랑스어 공부에 뛰어들었고, 그 이듬해인 2007년에는 스페인어를 마지막으로 추가했다.



사실 냉정하게 이야기하자면 공부는 누구든지 얼마든지 시작할 수 있다. 시작으로만 따지자면 20~30개 외국어인들 개인 이력에 추가하지 못할 이유가 있겠는가? 결국 문제는 배운 것을 어떻게 유지하느냐 하는 것이었다. 사서 고생도 그런 사서 고생이 없었다. 현실적인 이익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특별한 장래 계획이 있는 것도 아닌 상황에서 매일 일정 시간을 외국어 공부에 할애해야 하는 것은 그야말로 옆의 아름다운 산책길을 놓아두고 스스로 가시밭길을 선택해 걷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공부에 자극을 주기 위해 ‘학습 동기 유발 테크닉’도 써보았다. 자원해서 1년 내에 3개월 간격으로 각각 중국어, 일본어, 프랑스어, 스페인어 고급 자격 시험에 도전하여 모두 합격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운이 작용했는지 결과적으로 2011년 3월 중국어 HSK 6급 합격, 7월 일본어 JLPT N1 합격, 11월 프랑스어 DELF B1 합격, 마지막으로 2012년 5월 스페인어 DELE B2 합격을 성공적으로 이루어 내었다.

그리고 2019년 8월 마침내 정년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런데 정년 3년 전쯤인 어느날 와이프가 문득 한마디를 던졌다. ‘3년 후에 정년 퇴임하면 어학연수를 한번 해보는 것은 어때요?’ 뒤늦게 시작한 어학 공부에 대한 남편의 열정을 평소 옆에서 지켜보면서 남편에게 주는 퇴임 기념 선물이라고 했다. 처음에는 웃어 넘겼지만 생각할수록 그렇게 하는 것이 짧지 않은 개인적 어학 공부 여정에 유종의 미를 찍는 일이며 그동안 노력의 체면을 살리는 길이라고 여겨졌다.

결심이 서자 구체적인 계획 수립에 들어갔다. 생각 끝에 2019년 8월 정년 퇴임 후 반년간의 준비를 거친 뒤 2020년 3월부터 스페인어, 프랑스어, 중국어, 일본어의 순서로 각각 3개월씩 어학연수를 하고 중간중간에 3개월씩 재충전 기간을 갖는 총 2년의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이 계획을 2019년 8월 말에 있었던 서울의대 정년퇴임식장에서 퇴임사를 빌려 공개적으로 천명하였다.

그렇게 해서 마침내 지난 3월 2일 스페인어 연수를 위해 페루로 출국했다. 이후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로 인한 상황 변화로 금년에 계획된 프랑스어 연수를 내년으로 미루고 그 대신 페루에서의 스페인어 연수 기간을 늘려서 현재 공부 중이다. 이 모든 것이 운명의 힘이 아니라면 평생을 의대 교수로 지낸 사람이 4개국어 어학연수에 뒤늦게 도전하는 것이 가당키나 한 일이겠는가!?



*김 동문은 모교 의대 흉부외과 교수에서 2019년 정년 퇴임했다. 근육 단련과 외국어 공부 등 다양한 취미를 즐기며 다수의 관련 에세이를 출간했다. 페루에 머무르며 네이버 ‘짱구아빠의 블로그’에 어학연수 생활을 기록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