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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2호 2020년 11월] 기고 에세이

녹두거리에서: 내가 다시 학교로 돌아간다면

장재열 ‘청춘상담소 좀놀아본언니들’ 대표


내가 다시 학교로 돌아간다면



장재열
디자인06-13
‘청춘상담소 좀놀아본언니들’ 대표


“학부생으로 돌아간다면, 무엇을 다시 하고 싶으세요?”

처음 본 후배로부터 받은 질문입니다. 그날은 학부생들을 위한 특강을 나간 참이었거든요. 뭐라고 답은 해야겠는데, 순간 너무 많은 것들이 떠올라 말문이 막혔답니다. 사실 학과에서 특강요청이 왔을 때, 놀랐습니다. 모범생도 아니었고, 전공을 살린 선배도 아니었기 때문이지요. 학부 2학년 시절, 갑자기 불어닥친 퇴직 열풍에 아버지가 아슬아슬하게 걸려 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서, 저는 예술가의 길을 포기했습니다. 앞치마를 매고 “매점 좀 다녀올게요”라고 거짓말을 하며, 실기실을 떠나 경영대 취업 스터디에 종종걸음으로 찾아가곤 했지요.

교수님은 수업 때마다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흙을 대하는 태도가 평생의 삶을 대하는 태도가 된단다. 특히 재열이. 듣고 있니?” 철없던 저는 ‘언제 졸업해서 저 소리 안 듣나. S그룹 서류전형이 며칠까지였더라?’ 딴생각뿐이었죠. 4학년 무렵에 이미 대기업 합격 통보를 받은 저는 학교를 ‘뜰’ 생각뿐이었습니다. ‘욕먹지 않을 만큼만 졸업작품 하자. 졸업 안 시켜주면 취업 취소인데, 설마 그러기야 하겠어?’


일러스트 소여정(디자인09-13)


그런데 말이지요. 그렇게 바라던 대기업을, 1년 만에 제 발로 나오고 말았습니다. 중증 우울증과 공황장애가 발병했거든요. ‘고등학생 때는 서울대만, 대학생 때는 대기업만 바라보고 살았는데, 지금은 무엇을 바라보고 살아야 하지?’라는 근본적인 의문에서 마음의 병은 시작되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소위 3포 세대라고 불리던 딱 그 연배였던 저는 ‘불안’을 동력으로 살아왔거든요. “서울대를 가야만. 대기업을 가야만 뒤처지지 않을 거야. 조금만 방심하면 니트족이 될지도 몰라.” 같은 전형적인 요즘 청년들의 불안을 품은 채 그저 뒤처지기 싫어서 뛰어온 거지요.

퇴사 후, 저는 생각했습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지?’ 상담사 선생님은 말씀하셨지요. 현재에 집중하지 못한 채 살아온 나에게, 몸과 마음이 ‘지금에 집중해달라고’ 보내는 신호일지도 모른다고요. 그래서 하루하루 집중하며 정신질환 투병기를 인터넷 블로그에 올리기 시작한 것이 지금의 직업인, 칼럼니스트 겸 상담가의 토대가 되었습니다. 벌써 8년이 되었는데요. 요즘은 글을 쓰고, 상담하면서 역설적으로 학부생 시절 배운 것들이 가장 큰 자산이구나 느낍니다.

이를테면 이런 겁니다. 100개의 도자기를 구워도 95개는 깨 버리고 5개만 남듯, 100개의 글감을 찾아내도 막상 글로 탄생하는 것은 서너 개였고요. 비전공자가 보기에는 똑같은 흰색 컵 세 개를 놓고 미묘한 차이를 골라내는 훈련들이, 내담자들의 미묘한 마음 차이를 이해하는 세심한 시선과도 맞닿아 있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위에서 말한 후배의 질문에, 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음, 졸업작품 전시회를 다시 준비할 것 같네요. 내 앞에 닥친 현재의 과업을 최선을 다해 한 번이라도 마무리하는 경험은, 전공과 다른 직업을 가지더라도 큰 자양분이 될 테니까요.” 지금도 이따금 ‘이게 나한테 무슨 도움이 되지?’라며 외면하거나 회피하고 싶을 때, 학부생 시절을 떠올립니다. 그리곤 다시금 현재에 직면할 용기를 얻습니다.

관악에서의 4년, 저는 비록 직업에 도움 될 ‘기술’은 못 배웠지만, 인생에서 평생 품어나갈 ‘태도와 시선’을 배운 시간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장 동문은 2013년 비영리단체 ‘청춘상담소 좀놀아본언니들’을 차리고 5만 건에 달하는 청년들의 고민을 상담해왔다. 저서로 ‘오늘도 울지 않고 살아낸 너에게’, ‘사직서에는 아무도 진실을 말하지 않는다’ 등이 있다. 방송·강연 활동을 하며 한국일보 등지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