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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0호 2020년 9월] 인터뷰 동문을 찾아서

“카이스트에 기부한 766억 과학기술 위해 쓰이면 아깝지 않다”

이수영(법학56-60) 광원산업 회장·카이스트 발전재단 이사장




동문을 찾아서

“카이스트에 기부한 766억 과학기술 위해 쓰이면 아깝지 않다”

이수영(법학56-60) 광원산업 회장·카이스트 발전재단 이사장


“액수를 떠나 모든 기부자의 마음은 똑같습니다. 기부한 재산이 가치 있게 쓰이는 것, 그것 하나 바랄 뿐이에요. 그 작은 소망에 부응하는 것이 기부자에 대한 최고의 보답이자 예의일 것입니다.” 이수영(법학56-60) 광원산업 회장은 2012년 당시 700만 달러 규모의 미국 샌 버나디노 소재 건물을 카이스트에 유증 기부했다. 이후 2016년과 2020년, 세 차례에 걸쳐 총 766억원을 출연해 화제를 모았다. 첫 기부를 계기로 카이스트 발전재단 이사장에 취임한 그는 ‘이수영 과학교육재단’ 설립을 추진 중이며, 대한민국 과학기술 발전을 선도할 우수 인재 양성에 전력하고 있다. 지난 9월 7일 여의도 맨하탄빌딩에 있는 집무실에서 이수영 동문을 만났다.

-평생 모은 재산을 카이스트에 기부하셨습니다. 회장님이 모교 출신인 것을 아는 이들의 공통된 의문은 ‘왜 서울대가 아니었을까’ 하는 점일 것입니다.
“1971년 모교 법대장학재단 일에 관여하기 시작해 2010년엔 제16대 이사장을 지냈습니다. 재정부장, 장학회 이사를 거쳐 이사장이 되던 때, 장학재단 모금액이 42억원에 달했어요. 물론 그 돈 전부를 제가 모금한 건 아니지만, 절반 이상은 제가 직접 발로 뛰어 모았다고 자부합니다. 모교 법대 졸업생은 자신에 대한 자부심만큼 고마움도 느낄 줄 알아야 된다고 생각해요. 기생 출신 이차숙 할머니 같은 분은 서울법대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분이지만, 나라의 미래를 책임질 젊은이들이 돈이 없어 공부 못 하면 되겠냐며 십시일반 장학기금 모금에 참여하셨습니다. 그런데 해가 갈수록, 후배들이 과연 그 고귀한 뜻을 제대로 이해하고 받들었는지 회의감이 들었어요. 은혜를 입었으니 다시 후배를 지원하는, 그런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고 개인의 영달만 추구하는 경향을 보여 무척 실망스러웠습니다.”

-그러면 왜 하필 카이스트였는지요.
“저는 서울법대를 졸업했고 한 차례 사법시험에 응시하기도 했지만, 신문기자를 거쳐 경영인이 됐습니다. 낮춰 말하면, 그저 장사꾼이 된 거죠. 장사꾼의 눈으로 볼 때 국민의 삶을 윤택하게 하는 건 법이 아니라 과학기술이었습니다.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해방과 한국전쟁, 산업화와 공업화 과정을 목격하면서 우리에게 더 시급하고 중요한 것은 과학기술이라는 생각이 확고해졌어요. 그러던 어느 날 TV를 통해 서남표 당시 카이스트 총장의 인터뷰를 접했습니다. 2006년 부임한 그는 미국에서 배우고 가르친 경험을 살려 각종 개혁 정책을 카이스트에 도입했죠. 짧은 인터뷰였지만, 한국 사회가 발전하기 위해선 과학기술에 대한 투자가 얼마나 중요한지, 그에 따른 카이스트의 역할과 임무가 무엇인지 설명했습니다. 진심이 느껴졌어요. 서 전 총장은 외국에서 오래 공부했지만, 기술을 배워 조국에 기여하겠다는 포부가 뚜렷했죠. 이 사람을 도와줘야겠다, 생각했어요.”

-보통 사람은 평생 10억도 모으기 힘듭니다. 어떻게 그 많은 재산을 모으셨나요.
“서울경제에서 기자로 일하던 1971년 경기도 안양에 주말농장으로 광원목장을 세웠고, 1980년 퇴사 후 본격적으로 목축업에 뛰어들었습니다. 당시 신문기자 중엔 농촌을 걱정하고 한편으론 동경한 이들이 적지 않았어요. 제가 경기도 안양에 땅을 산 것도 이 무렵이었죠. 트랙터가 필요할 정도로 제법 규모가 컸습니다. 사업은 운이에요. 자수성가한 일부 사업가들은 좀 불쾌할지도 모르지만, 운이 내 앞을 지나갈 때 누구는 붙잡고 또 누구는 놓치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저는 운이 좋았어요. 돼지 두 마리와 암소 세 마리로 시작한 목장이 돼지 1,000마리, 젖소 10마리, 암소 100여 마리 규모로 성장해 1983년 KBS 프로그램 ‘잘살아보세’에 소개되기도 했죠.”

-목장 부근으로 제2경인고속도로 나들목이 건설됐습니다.
“1만 1,400여 평 가운데 1만 평이 제2경인고속도로 일직 IC에 편입됐습니다. 도로가 나기 전 목장부지에 깔린 모래가 눈에 들어왔어요. 모래는 모든 건축의 기본 자재입니다. 마침 전국에 건설 붐이 일 때였죠. 모래 채취는 제법 큰 사업이어서 그 일로 저는 짧은 기간 꽤 많은 돈을 벌었습니다. 그러나 수익이 높은 만큼 위험부담도 높았어요. 어떤 때는 온종일 트럭이 오가도 주문물량을 못 맞췄고, 어떤 때는 못 팔고 쌓인 모래가 바람에 날려 이웃의 원성을 사기도 했죠. 여름이면 뜨거운 뙤약볕을, 겨울이면 안양천 강바람을 맞으며 흙먼지와 씨름했습니다. 밤늦게 집에 와 모래가 버석거리는 얼굴을 씻고 서너 시간쯤 눈을 붙인 뒤 새벽같이 일어나 다시 하천으로 나가는 일상을 반복했어요. 그래도 돈 쌓이는 재미에 힘든 줄 몰랐죠.”


법대장학재단 이사장 시절 42억 모금했지만
은혜 잊고 개인 영달만 추구하는 후배들에 실망
서남표 총장 인터뷰 보고 카이스트 적극 지원
목축업·모래채취업·부동산 사업으로 성공
“남의 마음 움직이려면 먼저 솔선수범해야”


-사업하시면서 소위 ‘서울대 덕’을 본 적은 없으세요.
“모교 동문들과 서로 도움을 주고받은 적은 많죠. 모래도 팔고 소도 파느라 정신없던 시절, 법대 동기생 한 명이 서울신탁은행 돈암동 지점의 지점장이었습니다. 영업 실적 압박을 많이 받았죠. 그 동기생한테 제가 예금을 많이 들어줬어요. 대신 그 친구는 목장으로 은행직원들을 보내 든든하게 저를 도왔습니다. 소를 팔 땐 돈 1,000만원 이상이 오가는데, 소 장수들은 늦은 오후에 찾아와 100원짜리 동전부터 끝자락에 5원이 붙은 국고 수표까지 가져와요. 저 혼자선 도저히 셈을 할 수가 없죠. 그걸 은행 직원이 대신해줬어요. 정확히 돈을 세고 현장에서 챙겨 가니 강도 맞을 위험도 없었죠. 모래를 팔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은행 직원이 그 자리에서 셈하고 가방에 돈 넣고 전표를 끊어줬어요. 계산, 수금, 입금까지 원스톱 서비스를 받으니 저는 은행에 가서 통장만 확인하면 됐습니다. 15만원에 산 송아지를 키워 400만원까지 받았고, 모래 한 트럭에 6만2,000원씩 받아 10원 한 장 허투루 새나가지 않게 관리했으니 돈이 모이지 않으면 그게 되레 이상한 거죠.”

-광원산업 회장에 재직하고 계십니다. 광원목장과는 어떻게 다른가요?
“앞서 말한 그 지점장 동기생이 부장급으로 승진해, 본점에서 담보로 잡아둔 부동산을 압류하고 경매하는 일을 할 때였습니다. 지나가는 말로 ‘좋은 물건 없냐 ’ 물었더니 정말 좋은 물건인데 용도변경을 못해서 골치를 앓는다고 넋두리를 하더군요. 그 건물이 바로 이곳 여의도백화점이었습니다. 여의도 한복판에 위치해 목은 좋았지만, 증권회사 건물로 둘러싸여 백화점으론 적당하지 않았죠. 인근 환경에 맞춰 사무실이나 오피스텔, 호텔로 바꾸면 활용 가치가 훨씬 높아질 텐데 용도변경이 안 되는 바람에 발목이 잡힌 상태였습니다. 21차 경매까지 가면서 당시 가격은 16억5,000만원으로 떨어졌어요. 그만한 현찰을 동원할 순 없었지만, 계약금 1억5,000만원만 있으면 인수할 수 있었죠. 건물 임대만 되면 잔금 갚는 건 땅 짚고 헤엄치기란 생각이 들었어요. 1988년 여의도백화점 5층을 인수하면서 설립한 법인이 광원산업입니다. 광원목장이 인생의 반환점이었다면, 광원산업은 점프대였어요. 목축업, 모래판매업에 이어 부동산 사업에 뛰어들었죠.”

-서울 한복판에 내 건물이 있다는 건 어떤 기분인가요.
“비록 건물 전체는 아니지만, 그중 한 개 층이 내 것이라는 사실에 처음엔 가슴 벅찼습니다. 그러나 부동산 전문회사도 샀다가 포기한 건물이었어요. 오래전 문을 닫은 점포마다 쓰레기와 버려진 집기들로 가득해, 건물이 아니라 폐허를 인수한 기분이었습니다. 5층 전체가 1,076평이었는데, 목장직원들과 같이 망치, 쇠 지렛대를 들고 직접 철거 작업을 했어요. 그런 후 용도변경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 백방으로 수소문했습니다. 도시계획시설을 풀기 위해선 상공부, 서울시청, 담당 구청의 도시미관심의를 거쳐야 하며, 심의엔 공무원뿐 아니라 대학교수를 비롯한 분야별 전문가들이 다수 참석하기 때문에 쉽지 않았죠. 일주일 넘게 관계 부처를 쫓아다니며 용도변경에만 매달렸습니다. 이 과정에서 만난 사람 대부분은 기자 생활할 때 한 번 이상은 만났던 사람들이었어요. 결과는 대성공이었습니다.”

-임차인은 쉽게 구하셨는지.
“바로 위층에 당시 제1야당이었던 평화민주당이 입주해 있어 데모대가 들어오면 우리 빌딩뿐 아니라 인근 빌딩까지 시끄러웠습니다. 건물 보러 온 사람이 그 소리를 들을까봐 라디오로 음악을 틀어놓곤 했지요. 그러던 어느 날 증권예탁원의 전신인 증권대체결제원에서 찾아왔습니다. 5층 전체를 빌려 채권과 증권을 보관하는 공간으로 활용했어요. 보증금 3억에 월 2,700만원으로 좋은 조건이었죠. 7년 동안 받은 임대료로 건물 매입비를 충당하고도 남았습니다. 사업 수완이 알려지자 10년 가까이 관리비만 빼앗기다시피 한 다른 층 소액 점주들이 자기 점포를 인수해달라고 사정했고, 증권예탁원에선 더 많은 공간을 요청하면서 건물 지분을 늘려갔습니다. 현재는 지하 4층, 지상 14층 건물 중 3분의 1을 소유하고 있어요.”

-미국 소재 부동산을 구입하신 계기는 무엇인가요.
“2000년대 들어 부동산 해외투자를 300만 달러까지 허용하면서 현지 부동산 시장에 관심을 갖게 됐습니다. 미국은 부동산 등 재산과 관련한 서류를 작성하면 반드시 상속자를 지정하게 돼 있더군요. 그렇지 않으면 사후에 무조건 국가에 귀속된다고요. 가끔 내가 죽으면 누가 내 묘지를 찾아줄까, 생각해본 적은 있었지만, 그때만큼 제가 혼자라는 게 생생하게 느껴진 적은 없었어요. 그때부터 은밀하게 기부할 곳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당연히 모교가 먼저 떠올랐죠. 지금의 나를 있게 해준 서울대를 왜 생각하지 않았겠어요. 그런데 서울대는 기부금을 유용하게 쓰지 못하는 것 같더군요.”

-카이스트 발전재단 이사장으로 활동하고 계십니다. 모교 발전기금이나 본회 장학기금 모금 사업에 조언해주신다면.
“1968년 한국경제신문을 퇴사할 때 받은 퇴직금이 4만원이었어요. 한 푼도 쓰지 않고 그대로 서울법대장학재단에 기부했습니다. 당시 동창회에서 적립해 둔 장학금 총액이 100만원이었으니까 한창 젊은 동문이 기부한 액수로는 적은 돈이 아니었죠. 누군가의 마음을 움직이려면 내가 먼저 그 일을 해야 합니다. 장학금 모금도 마찬가지예요. 누군가로부터 장학기금을 기탁받으려면 나부터 솔선수범하는 모습을 보여야 합니다. 그래야 설득할 명분과 힘이 생기죠. 제 경험상 진심으로 대하면 그 진심은 반드시 상대에게 전달됩니다. 그땐 거꾸로 기부자나 유증자가 감동을 받게 돼요.”
나경태 기자


이 동문은
1936년 4월 서울 종로구에서 4남 4녀 중 막내딸로 태어나 1956년 모교 법대에 입학했다. 사법고시에 한 차례 응시했으나 고배를 마셨고 1963년 서울신문 10기 견습기자에 합격하면서 기자 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한국경제신문을 거쳐 1969년 서울경제신문에 입사, 1980년 퇴사할 때까지 17년 동안 기자로 일했다. 1971년엔 모든 언론인이 동경하는 특별취재상을 받았다. 그해 광원목장을 창업했고 신문사에서 퇴사한 후 본격적으로 목축업에 뛰어들었다.

1984년 전국 새양축가상을 수상했으며, 새마을중앙회 전국 새마을 후계자 300명에게 성공사례의 연사로서 강연 활동도 병행했다. 1988년 여의도백화점이 입점한 맨하탄 빌딩의 5층을 인수하면서 광원산업을 설립했고, 건물 최대 소유권자 자격으로 빌딩 관리단 회장이 됐다. 2013년 자랑스러운 경기인상, 2018년 국민훈장 목련장을 받았으며 독신으로 지내다 81세에 모교 법대 동기인 김창홍 변호사와 결혼했다. 관악산 남단에 거주하면서 여의도 회사로 거의 매일 출근하는 등 왕성한 사회활동을 이어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