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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4호 2020년 3월] 뉴스 모교소식

총장이 띄우는 편지, 신입생과 졸업생에게

모두 우왕좌왕할 때 이끄는 사람이 되라
총장이 띄우는 편지


모두 우왕좌왕할 때 이끄는 사람이 되라
신입생에게


서울대학교 20학번 신입생 여러분 환영합니다. 코로나19 바이러스 확산으로 직접 여러분의 얼굴을 마주하고 축하의 인사를 나누지 못하게 된 사정을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제가 알기로 입학식 행사를 취소한 일은 우리가 관악으로 이사 온 이후 처음 있는 일입니다. 저를 포함한 모든 서울대 구성원은 이 비상한 봄에 서울대 공동체에 들어온 여러분을 특별히 애틋한 마음으로 어느 때보다 더 열렬히 환영합니다.

신입생 여러분. 공식 입학식이 취소됐다고 해서 서울대 학부 생활에 대한 여러분의 기대가 어긋날 일은 없습니다. 선후배 간 교제와 사제 간 만남을 기다리는 여러분의 설렘이 깨질 일도 없습니다. 사실 서울대에서 벌어지는 가장 중요한 일들, 즉 수업과 연구 그리고 생활과 교제는 대학교보다 작은 단위에서 활발히 벌어집니다. 대학별, 학과별, 전공별로 작지만 보람찬 만남들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선생님과 선배들, 그리고 여러분과 함께 고락을 나눌 동기들이 그곳에서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서울대 내 작은 공동체에 적극적으로 스며들고 섞여서 대학 생활을 즐기기를 바랍니다.


서울대인의 자세 별도로 있어
여러분 중에는 벌써 전공별 이수학점과 졸업 학기를 염려하는 학생들이 있을지 모릅니다. 수업에 대한 기대보다 학점에 대한 걱정이 앞서는 학생들도 있을 겁니다. 특히 과제를 놓고 함께 고생할 동기들과 이미 고생이란 고생은 다 해 본 듯 보이는 몇 년 차 선배들을 만나면서 염려와 걱정을 다듬어가며 정교한 계획을 세우고 있을지 모릅니다. 그 정교한 계획이 성공할지 말지는 제가 잘 모르겠습니다만, 그런 걱정과 염려가 부질없다는 것은 제가 잘 압니다.

여러분의 훌륭한 선배들이 겪었던 경험과 경로를 보면 알 수 있답니다. 서울대 학부를 다녔다는 경험은 그저 시험을 보고 졸업 학점을 채우는 일에 그치는 일이 아닙니다. 생각해 보면, 과제나 시험의 난이도란 애초에 그런 과제나 시험을 내는 수업을 선택해서 준비하는 여러분의 자세에 달렸습니다. 여러분은 매 순간 선택하고 결심해야 합니다. 학점을 따기 위해서도 그렇지만, 학업과 연구의 기초 체력을 다지고, 지적인 호기심을 충족하며, 미지의 분야에 도전하기 위해서도 그렇습니다. 이 과정에서 얼마나 적극적으로 교수님과 대화하는지, 얼마나 자주 동료와 토론하고 협동하는지, 그리고 때로 고요히 홀로 앉아 독서하고 숙고하는지 등과 같은 자세가 중요합니다. 이 자세가 여러분의 대학 생활을 결정하고, 나아가 졸업 이후 여러분의 역할에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저는 서울대인의 자세란 것이 별도로 있다고 믿습니다. 모두가 혼란 속에서 우왕좌왕할 때, 그나마 믿고 따를 만한 사람이 있습니다. 서로 각자의 이익을 좇아 단기적 성과에 집착할 때, 장기적 목표를 확인하고 방향을 제시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다수가 신념을 잃고 방황할 때, 그나마 일관된 정신으로 탐구와 성찰을 주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저는 서울대에서 교육받고, 함께 교제하며, 또한 고독하게 고민하는 학생들이 결국 그런 종류의 사람이 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함께 교제하며 때론 고독하게
지금 변종 바이러스의 등장과 전염병 확산으로 우리 사회 구성원 모두가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우리가 겪고 있는 이 시련이야말로 진정한 서울대인이 평소 학업과 훈련을 통해서 대비하고, 도전의 순간에 결정적으로 역량과 덕성을 발휘해서 대처할 수 있도록 준비해야 할 이유를 말해 줍니다. 우리는 평소에 장기적 관점과 넓은 전망으로 사태를 파악하고, 탐구와 성찰을 통해서 대안을 만들어 나가며, 이념과 정파에 흔들리지 않고 독립적으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역량과 덕성을 키워야 합니다. 여러분의 대학 생활이 이런 역량과 덕성을 키우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서울대에 입학하기 전부터 여러분은 아마도 각자 속한 집단의 기대를 받는 몸이었을 겁니다. 그러나 가까운 사람의 기대란 때로 부담이 되기도 합니다. 가족과 친구, 집단과 공동체의 기대를 충족하는 일은 분명 보람 있는 일입니다만, 그런 충족은 때로 혈연과 집단의 시야에 국한되어 좁은 이익에 머물고 맙니다. 여러분의 이상은 혈연과 집단의 기대를 충족하는 데 그쳐서는 안 됩니다. 좁은 안목을 넘어서 넓은 이익을 보여주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새로운 전망을 제시하고 그것이 실현 가능함을 밝혀주는 것이어야 합니다. 여러분의 이상은 가까운 사람이 기대할 수도 없었던 새로운 자랑스러움의 원천이 되어야 합니다. 지금으로부터 몇 년이 지나면 여러분은 서울대 학부를 졸업하게 될 것입니다. 여기에 계속 머물러 연구하는 사람도 있겠고,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역할을 맡아 임무를 수행하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여러분은 각자 서울대인답게 열심히 살겠지만, 어느 날 문득 입학식 행사도 없이 대학 생활을 시작한 20학번 동기들을 떠올리게 될 것입니다. 그때 조용히 웃으며 돌아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시작은 어수선했지만, 과정은 보람찼으며, 동료와 선후배와 함께 했던 모든 시간들이 아름다웠다고 기억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미래에 더 재미있고, 더 놀라운 일이 생긴다
졸업생에게

먼저 예기치 않았던 코로나19 바이러스 사태 때문에 졸업식을 거행하지 못하게 된 것을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직접 얼굴을 보지는 못하지만, 오늘 졸업의 영광을 안게 된 졸업생 여러분 모두에게 마음으로부터 진심으로 축하의 말씀을 전하고 싶습니다. 학사모를 쓰게 된 대학 졸업생, 석박사 학위를 받으신 대학원 졸업생 여러분, 모두 축하합니다. 

지난 몇 년 동안 간직하고 싶은 좋은 기억과 경험, 잊고 싶은 기억과 경험이 많았을 겁니다. 학점에 즐거워하거나 괴로워했던 경험, 달콤한 연애를 하면서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은 기뻤던 순간과 거꾸로 세상이 붕괴된 거 같은 허망한 순간도 있었을지 모르겠습니다. 자신의 미래에 대해 자신감이 넘치던 날이 있었을 것이고, 반대로 앞으로 10년 뒤의 자신의 모습이 그려지지 않아서 불안해하던 날도 있었을 것입니다. 오늘 졸업식 하루 만이라도 학교를 다니면서 속상했던 기억들, 그리고 여러분들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다 떨쳐 버리면 좋겠습니다. 다시 여러분들의 졸업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기생충’ 수상이 보여준 협력과 공생
2주일쯤 전에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아카데미상 4관왕을 수상했습니다. ‘기생충’ 수상을 보면서, 이번 졸업식 축사에서 이 영화 얘기를 좀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마 여러분들도 영화를 봤거나 영화 얘기를 들었을 겁니다. 저는 두 가지 생각을 했습니다.

하나는 ‘경쟁’과 관련한 것입니다. 개개인의 차이는 있겠지만, 여러분들이 대학과 대학원에 입학했던 과정, 그리고 학생으로서의 삶의 많은 부분은 경쟁으로 점철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입학을 위한 경쟁, 입학 후 좋은 학점을 받기 위한 경쟁, 원하는 과목을 듣기 위한 경쟁, 장학금을 받기 위한 경쟁 등이 있었을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들은 졸업을 하면서, 아마 또 다른 경쟁에 접어든다고 생각하고 있을지 모릅니다. 경주의 출발선에 서서, 준비 자세를 취하고, 총소리를 기다리는 육상선수의 마음일지도 모릅니다.

‘기생충’의 수상을 보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감독과 제작자가 상을 받았지만, 송강호라는 주연배우가 명연기를 한 것을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겁니다. 또한 모든 조연 배우들도 너무 멋진 연기를 했습니다. 외국에서는 ‘제시카 송’이 그렇게 인기였다고 합니다. 편집자와 촬영감독도 큰 역할을 했구요. 자막을 번역했던 번역자가 없었다면 어땠을까요? 누구 한 사람이 빠진 ‘기생충’을 생각하기 힘들었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앞으로 살아갈 삶을 1등으로 들어와야 하는 100미터 경주가 아니라, ‘기생충’과 같은 멋진 영화에 참여하는 창작 활동으로 생각하는 것이 어떨까 싶습니다. 경쟁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 세상에는 경쟁보다는 협력이, 독선보다는 조화와 어울림이 힘을 가진다고 봅니다. 1등을 향한 경주만 있었다면, 협력과 공생의 군무와 같이 서로서로를 위하며 정말 좋은 작품을 만들려는 노력이 없었다면, ‘기생충’은 가능했을까요? 즐겁고 보람 있는 삶은 오히려 이렇게 묵묵히 자기 역할에 충실할 때 보석과 같은 작품을 통해서 각자에게 성큼 다가온다고 생각합니다.

소외된 이웃 포용하는 리더가 되라
두 번째 생각은 영화가 던지는 메시지와 관련된 것이었습니다. 아카데미상을 받기 이전부터 ‘기생충’이 세간의 화제가 되었던 것은 이 영화가 빈부격차, 계급 갈등, 기득권의 문제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지난 몇 십 년 전에 비해서 우리 사회는 훨씬 더 잘살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꿈꿔왔던 선진국에 가까워졌습니다. 그렇지만 계층 간의 격차가 심각하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습니다. 더 걱정스러운 일은 이런 격차가 교육을 통해서, 특히 대학 교육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예전에는 교육이 계층 상승을 가져올 수 있는 좋은 사다리로 여겨졌다면, 지금은 교육이 계층 간의 격차를 유지하고, 이 격차를 더 벌리는 수단으로 이용된다는 것입니다.

서울대학교에 입학해서 교육을 받는 학생들은 다른 대학교의 학생들이나 대학에 들어가지 못한 동년배 젊은이들이 받지 못하는 물질적, 정신적 혜택을 많이 받고 있습니다. 이런 혜택은 졸업을 한 뒤에도 일정 정도 이어집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우리 사회 곳곳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면서, 자신과 세상에 도움이 되는 성취를 이루기를 희망합니다. 그리고 혜택을 입은 자로서, 사회의 소외되고 어려운 사람들을 포용하고 이들과 함께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따뜻한 마음을 가진 리더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여러분들이 혜택을 받았다면, 그 혜택은 지금 이 자리에 없는 사람으로부터 왔고, 또 그 일부는 바로 이런 소외된 계층으로부터 왔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대학과 대학원에 입학할 때 결심한 뜻을 이루고 졸업하는 여러분들에게 축하의 메시지를 보내고 싶습니다. 하지만 아마 많은 학생들이 입학할 때 세운 뜻을 충분히 이루지 못하고 학교를 떠날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실망할 필요 없습니다. 학생으로 있었던 시간보다 앞으로 여러분들의 미래에 더 중요하고, 더 재미있고, 더 놀라운 일이 많이 생길 겁니다. 그런 풍성한 기대를 가지고, 좋은 기억을 가지고 대학 문을 나서길 염원합니다. 여러분 모두의 졸업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