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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2호 2020년 1월] 인터뷰 화제의 동문

“늘 가슴에 품은 모교, 아버지의 흔적 찾아줘 더 고마웠죠”

모교에 총 25억 기부 미주동창회 주중광(약학60-64)·허지영(화학66-70) 동문 부부

“늘 가슴에 품은 모교, 아버지의 흔적 찾아줘 더 고마웠죠”


미주동창회 주중광(약학60-64)·허지영(화학66-70) 동문 부부




신약개발 성과 바탕 재단설립
수리과학부 3억, 총 25억 기부



“70년이 지났는데도 아버지를 기억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후학 양성을 위한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서울대 수리과학부를 조금이나마 돕고자 합니다.”

재미 약학자인 주중광(약학60-64) 조지아대 약대 명예 석좌교수와 전 미주동창회 조지아지부 회장을 지낸 허지영(화학66-70) 동문 부부가 지난 10월 모교 자연과학대학에 발전기금 30만 달러(약 3억원)를 쾌척했다. 지금까지 총 300만 달러(30억원)를 약정하고 25억원을 출연, 미주 동문 중에서도 모교에 가장 많은 발전기금을 출연한 이들이다. 2012년부터 10년간 주 동문이 졸업한 약대에 장학금과 학술 강연 지원금 각 1만 달러, 허 동문이 졸업한 화학부에 장학금 1만 달러를 매해 지원하고 있다. 2017년엔 낡은 약대 건물의 재건축에 써달라며 거금 200만 달러(약 22억 4,000만원)를 쾌척했다.

두 동문이 또 한 번 기부를 결심한 것은 주 동문의 장인이자 허 동문의 아버지인 허 식(수학48졸) 전 모교 수리과학부 교수를 기리기 위해서다. 자연대 수리과학부에 10년간 허 식 교수 장학금과 더불어 허 동문의 어머니 이순동 여사의 이름을 붙인 교수학술기금을 지급한다. “먼 타국에서 오래 생활했지만 모교를 늘 가슴에 품고 산다”는 이들을 12월 말 이메일로 인터뷰했다.

“아버지는 나라와 사회, 가정 모두 어려운 환경에서도 수학에 대한 사랑과 열정을 가진 청년 가장이셨습니다.” 1919년생인 허 식 교수는 연희전문학교 졸업 후 1946년 모교에 편입해 2년 후 학사학위를 받았다. 수리과학부의 전신인 문리대 수학과에서 전임 강사를 지내며 수학 교육의 필요성을 절감해 중등 수학교과서도 집필했다. 한국전쟁 발발 직후 그는 문리대 교정에서 납치돼 다시 돌아오지 못했다. 31세의 젊은 아버지와 당시 다섯 살에 불과했던 허지영 동문, 오빠 허 천(화학공학60입 텍사스오스틴대 교수) 동문 남매가 영영 이별한 순간이었다.

그립고 궁금했던 아버지의 흔적을 조우한 것은 70년이 흐른 뒤 서울대에서였다. “아버지가 서울대 수학과에 재직하셨다는 말을 어머니께 들으면서 자랐어요. 2018년 미주동창회 조지아지부 회장을 지낼 때 김판기 수리과학부 교수님께 조지아에 거주하는 문리대 졸업생 명부를 보내달라는 이메일을 받고 사정을 말씀드렸죠. 한국에 갈 때 남편, 오빠와 수리과학부에 방문하고 싶다고 부탁드렸어요.”

2018년 10월 모교를 찾은 이들에게 수리과학부는 깜짝 선물을 건넸다. 한국 과학사와 수학사 관련 책에서 허 식 교수 관련 자료를 찾아 모아온 것. 어렴풋이 추측만 하던 아버지의 서울대 재직 시절 행적이 거기 있었다. 허 동문은 “오빠가 노란색 펜으로 하이라이트된 아버지에 대한 글을 목메인 소리로 읽었을 때의 감동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수리과학부 교수들도 자기 일처럼 기뻐해줬다.

직접 쓴 수학 교과서 머리말에 “제군들이 배운 수학을 산업 발달에 어떻게 활용할지 늘 궁리하고 실천해달라”고 적은 허 식 교수. 못다한 후학 양성의 뜻을 딸과 사위는 기부로 이어가기로 결심했다. 지난해 허 식 교수 탄생 100주년에 맞춰 협약식을 열었고 학부에선 심포지엄까지 열어줘 고마운 마음뿐이다. “아버지는 당시 전임강사 월급이 부족해 경기고 시간강사로 일하며 가족을 부양하셨다고 해요. 화학과 김호징 명예교수님이 경기고에서 아버지의 강의를 들었다고 전해 주시더군요. 오빠에게 ‘자네 부친을 똑 닮았네’라며 기억해 주셔서 너무 감사했죠. 역경 속에서도 최선을 다하며 사신 아버지께 존경과 자부심을 가지게 됩니다.”

약학자인 주 동문은 일찌감치 신약 개발로 환자들의 고통을 덜어줌으로써 사회에 공헌했다. 모교 졸업 후 1968년 도미해 아이다호주립대에서 석사학위, 뉴욕주립대 버팔로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1982년 조지아대 약대에서 교수 생활을 시작했다. 첫 국산 B형 간염 치료제인 ‘레보비르’에 이어 친구들과 신약개발기업 파마셋을 설립, ‘C형 간염 꿈의 치료제’로 불리는 ‘소발디’를 발명했다. 완치율이 낮아 간암으로 전이되거나 간이식이 불가피했던 C형 간염의 완치율을 90% 이상 끌어올린 획기적인 약이었다.

세계적인 약학자 반열에 오른 주 동문은 신약개발에 공헌한 성과로 미국국립보건원이 미국 전체 연구자의 5% 미만에 수여하는 ‘NIH 메리트 어워드’를 10년간 받았다. 국제적으로 핵산연구에 공헌한 과학자에게 주는 몽고메리 어워드, ‘National Academy of Inventors’에 선정됐고 2017년엔 국제항바이러스학회에서 항바이러스제 신약 개발 공로로 앤서니 홀리 어워드를 수상했다. 지금도 매일 조지아대 연구실에 출근해 박사후 과정 제자들을 지도한다.

부부는 2011년 장학재단 ‘The Chu Family Foundation’을 설립해 성공의 결실을 사회에 돌렸다. 재단을 통해 모교를 비롯한 한국과 미국 대학 총 10곳의 학생을 후원하고 애틀랜타 조지아의 한글학교에도 장학금을 지급하고 있다. “1년에 총 40만 달러 정도를 재단을 통해 지급하고 있습니다. 우리 부부가 장학금을 받고 다닌 미국 대학과 두 딸이 다닌 학교가 포함됐죠. 장학생 선정은 대학에 일임하고, 미국 참전용사 후손은 한 학생당 2,000달러씩 2014년부터 매년 12~15명에게 줍니다. 우리가 참석하는 국제학회 두 곳을 통해 젊은 여성 학자에게도 과학계 진출을 돕는 장학금을 주고 있어요.”

주 동문은 “요즘 한국이 걱정돼 잠을 설칠 때가 많다”고 했다. “한국이 살 길은 한미동맹을 강화하는 길밖에 없다. 친중을 하면 75년간 우리 선배들이 피땀으로 이룬 나라의 존폐가 위태로울 것”이라는 조언. 모교에 대해서도 “약대가 함춘원에 있던 시절 봄이 참 아름다웠다”고 회상하는 한편 고언을 아끼지 않았다. “위대한 대학은 학생의 질이 아닌 교수의 질에 의해 결정됩니다. 서울대가 세계 유수 대학이 되려면 어떤 방식으로든 지금보다 더 교수의 질을 높이고 교수들이 자기 역량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도록 학문의 자유를 주어야 합니다.” 약학과 신약개발 연구 성과를 낸 한국 과학자를 위해 기금을 출연한 ‘주중광 렉처십 어워드’가 매년 모교 약대에서 열리고 있다.

유학 시절 캠퍼스에서 만나 올해로 48년째 해로하는 두 동문에게 앞으로의 계획 대신 공유하는 인생관을 물었다. ‘심청사달(心淸事達)’과 ‘인과응보(因果應報)’, “마음을 깨끗이 하면 모든 것이 순조롭게 된다. 개인이나 국가나 결국 행한 대로 돌려받는다”고 뜻을 풀이했다. 두 동문은 자신의 삶을 통해 이 말을 증명하고 있다.


박수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