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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호 2019년 11월] 기고 에세이

녹두거리에서: 당신 일생에서 최고로 아름다웠던 순간은

한재우 작가·유튜브 ‘재우의 서재’ 운영


당신 일생에서 최고로 아름다웠던 순간은



한재우
법학00-07
작가·유튜브 ‘재우의 서재’ 운영



얼마 전 ‘삶의 예술 세미나’라는 작지만 따뜻한 자리에 참여했을 때의 일이다. 간단한 자기소개 후의 첫 번째 세션에서 나온 질문이 나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당신의 일생에서 최고로 아름다웠던 한 순간은 언제인가요?”

답을 떠올리기가 어려웠기 때문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질문자가 마음속에 떠오르는 장면을 솔직하게 나눠달라고 부탁했는데, 나로서는 그렇게 떠오른 장면이 퍽 예상 밖이었던 것이다. 일생에서 꼽은 최고의 순간이라 하면 적어도 ‘시험 합격 발표’라거나 ‘에펠탑에서 바라본 일몰’쯤은 되어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나의 가슴이 기억해낸 장면은 그렇지 않았다.

나는 군대를 퍽 늦게 갔다. 고시 공부를 택했던, 그리고 기대한 대로 잘 안 풀린 사람들에게는 제법 드물지 않은 일이었다. 입영일자는 여름의 한복판에 있었다. 입소한 다음날 배식에 삶은 닭과 풋고추가 나오는 것을 보고 초복임을 알았다. 더웠고, 힘들었다. 땀과 먼지가 범벅이 되어도 잘 씻지 못하는 곳에서 설상가상으로 나는 ‘쓰레기 분리수거 조’에 편성되었다. 중대 전체에서 나오는 모든 쓰레기를 일일이 분리하여 쓰레기장에 가져가는 일이었다. 상투적이지만 결코 틀린 표현은 아니었던 ‘산더미 같은’ 쓰레기 속에는 식당에서 나오는 통조림 깡통도, 병사들이 마신 우유팩도, 화장실에서 나온 휴지도 있었다. 분리수거 조에 속한 이들은 매일 저녁 그것들을 하나하나 헤집고 나누어 담았다. 집게도 없이, 낡은 장갑을 낀 손으로.

그 해에는 신종 플루가 유행이었다. 한참 늦은 군 입대에, 한여름이라는 시기에, 쓰레기 처리라는 삼중고 안에서 나는 계속 기침을 했다. 밤에는 더 심해져서 자다가 기침을 하면 허파 두 쪽이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의무실에서 주는 늘 똑같은 세 알의 약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간절한 눈빛으로 몇 번인가 의무실을 찾았을 때, 내 나이와 ‘관악구 신림동’이라 적힌 주소를 본 군의관이 학교 후배임을 알고는 하얀 마스크 너머로 나지막이 말했다. “재우야, 이 약을 먹는다고 낫지는 않을 거야.” 나는 그 뒤로 의무실을 가지 않았다. 결국, 마지막 훈련인 각개전투를 마치고 나서 앰뷸런스에 몸을 실은 나는 수액을 맞으며 밤새 덜덜 떨었다. 체온이 41도였다.

그 지독한 고열과 기침은 훈련소를 퇴소하고 자대 배치를 받자 거짓말처럼 멎었다. 뜨거운 물로 씻고, 한 움큼의 새 약을 먹고, 깨끗한 담요 아래서 푹 자고 일어났을 때 몸이 날아갈 듯이 가벼웠다. 더 이상 아프지 않았다. 은행잎이 물든 가을 즈음이었다. 이병 계급장을 달고 연병장을 뛰며 문득 ‘너무 행복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프면 약도 있고, 때 되면 밥도 있고. 아무 걱정이 없네.’ 그런 마음으로 고개를 들어 바라본 가을 하늘은 아름답다 못해 찬란했다.

내가 세미나에서 떠올린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이런 ‘별 볼일 없는’ 경험이 일생에서 최고로 아름다운 순간이어도 괜찮은 걸까. 내가 당황해서 주저하고 있는 사이에 다른 참가자들이 먼저 이야기를 풀어놓기 시작했다. 30대에서 70대까지, 다양한 삶의 길을 걸어온 분들이 꼽은 최고의 순간들은 이랬다. ‘나뭇가지에 앉은 새 두 마리를 발견했을 때, 저만치서 학교를 마치고 걸어오는 딸아이를 보았을 때, 가족과 먹을 커다란 수박을 사서 유모차에 실었을 때….’ 모든 이들의 모든 장면 가운데, 굉장하고, 애를 써야 하고, 돈이 많이 드는 순간은 단 하나도 없었다. 나는, 나의 기억을 그대로 이야기해도 괜찮겠구나 싶었다.



일러스트 소여정(디자인09-13) 동문



열심히 일하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많은 사람들은 ‘행복하기 위해서’라고 답을 할 것이다. 행복을 얻기 위해서는 많은 땀과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 당연하다고 믿으면서 말이다. 그런데 혹시 ‘정말 아름다운 행복’은 큰돈이나 번듯한 성공과는 무관한 것이 아닐까. 노력의 가치를 부정하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냥 특별한 이유가 없어도 얼마든지 지금 당장 행복할 수 있지 않겠느냐, 하는 생각이 들어서다. 지금, 우리에게 약도 있고, 밥도 있다면.



*한 동문은 팟캐스트 ‘서울대는 어떻게 공부하는가’에 이어 유튜브에서 서울대 추천도서, 고전 등을 소개하는 ‘재우의 서재’를 운영 중이다. 공부하는 남녀노소를 위해 쓴 책 ‘혼자 하는 공부의 정석’을 베스트셀러 반열에 올렸다. 최근 에세이 ‘노력이라 쓰고 버티기라 읽는’을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