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보기

Magazine

[500호 2019년 11월] 오피니언 동문칼럼

산업혁명 이끈 나라가 세계사 주역이었다

김명자 한국과기단체총연합회 회장·전 환경부장관·전 국회의원


산업혁명 이끈 나라가 세계사 주역이었다



김명자
화학62-66
한국과기단체총연합회 회장
전 환경부장관·전 국회의원



자본·공산주의 탄생시킨 1차 혁명
개방과 혁신, 협력과 상생 깨우쳐



이른바 4차 산업혁명의 대전환기에서 돌연 미중 간 무역 분쟁과 일본의 수출 규제로 인해 글로벌 가치사슬(Global Value Chain)이 위협을 받고 있다. 세계 여러 나라가 제품의 설계, 원자재와 부품의 조달, 생산, 유통, 판매에 이르는 전 과정에서 협력과 분업에 의해 값싸고 품질 좋은 제품을 세계에 공급한다는 ‘메이드 인 더 월드’ 체제가 균열 조짐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더욱이 강대국들이 국가주의에 기반한 보호무역에 앞장서고 있으니, 이대로 간다면 세계적으로 산업 지형이 요동칠 것으로 우려된다. 2010년대 이전의 금융위기에서 가장 영향을 덜 받은 것이 독일의 제조업이었다면서 제조업 혁신에 나섰던 상황이 급반전되며, 난데없이 미중 무역 분쟁의 불똥이 독일의 제조업으로 튀고 있다. 기술패권의 치열한 경쟁마당에서 우리 경제는 이 파고를 어찌 넘을지 비상구가 절박하다.

17세기 유럽에서의 과학혁명 이후, 역사 속의 산업혁명은 단순히 기술과 산업의 혁신만이 아니라 새로운 이즘(ism)을 탄생시켰다. 18세기 영국에서 비롯된 1차 산업혁명(1760-1830)의 경우, 기술적 키워드는 석탄, 증기기관, 직물산업, 역직기와 방적기, 도로와 운하, 코크스 제철법, 철도였다. 사회적 동인으로는 17세기 후반의 명예혁명에서 비롯된 정치적, 제도적 기반과 자유시장경제의 기업가정신이 공신이었다.

1차 산업혁명기에 그 긍정적 측면으로부터 영감을 받아 출현한 이즘이 근대 자본주의였다. 영국 글래스고에서 공장의 대량생산과 항구의 자유무역으로 경제가 활성화되는 것을 지켜본 글래스고 대학의 도덕철학 교수 애덤 스미스는 1776년 ‘국부론’을 출간한다. 어느 나라든지 개인의 이익, ‘보이지 않는 손’인 자유시장, 사회적 공익 프레임의 세 가지 요건이 국부를 창출하는 동력이라고 본 그의 이론은 토지를 기본으로 하는 중농주의나 금과 은의 축적을 기본으로 하는 중상주의를 대체하는 획기적인 경제 사상이었다.

그리하여 자본주의라는 용어를 한 번도 쓴 적이 없는 스미스는 ‘자본주의의 아버지’가 되고, ‘국부론’ 은 예컨대 2008년 BBC 설문조사에서 지난 1,000년간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저작이 된다. 스미스의 자유시장 경제이론은 부자들 편에 섰다는 오해를 사기도 했으나, 그의 이론은 오히려 빈곤층에 대한 연민으로부터 나온 것이었다. 이후 자본주의는 개인의 경제적 이기심이 사회의 도덕적 규범 내에서만 허용된다고 본 그의 전제에서 벗어나게 되면서, 길을 잃고 갖가지 다른 형태로 수정되는 과정을 밟고 있다.

영국의 산업혁명기에 활약한 산업가로 조슈아 웨지우드의 공은 지대했다. 그는 1762년 여왕의 도자기를 제조하고, 금박기술을 도입하는 등 최고의 품질을 추구하는 장인정신의 소유자였다. 또한 운하와 도로 건설의 인프라 구축을 선도했고, 마케팅 전략으로 쇼핑 혁명을 일으켰다. 아름다운 도자기와 어울린 차 문화가 귀족으로부터 보통 사람들에게 전파되면서 영국은 차를 수입하느라 중국 청나라에 막대한 양의 은을 지불하게 된다. 흘러나간 은을 되돌려 받기 위해 영국은 동인도회사를 통해 재배한 아편을 중국에 들여보낸다. 그 결과 1,200만명이 아편 중독자가 된다. 그 해악을 인식한 중국이 아편을 압수하자 1839년 영국 함대가 출동함으로써 제1차 아편전쟁이 발발한다.

산업화로 무장한 영국은 자유무역을 기치로 중국의 자급자족의 쇄국정책을 무너뜨렸고, 중국은 난징 조약으로 5개 자유항을 열고 홍콩을 조차 당하는 치욕을 겪었다. 빅토리아 왕조에서 총리를 네 번 지낸 글래드스턴은 아편전쟁을 가리켜 영국 역사상 가장 불명예스러운 전쟁이라고 표현했다. 이 불명예스러운 전쟁은 2차(1856-1860)로 이어진다. 난징 조약의 실질적 성과에 불만을 품은 영국이 산업혁명으로 과잉 생산된 자국의 면제품 시장을 개척하기 위해서 애로호 사건을 빌미로 벌인 전쟁이었다.

1차 산업혁명기에는 자본주의에 대치되는 또 다른 이즘이 출현한다. 아동 노동 착취 등 노동 현장의 부정적인 측면에 주목해서 사회 개혁을 주창한 마르크스주의였다. 역사를 계급 갈등으로 본 카를 마르크스는 1848년 산업혁명기의 새로운 계급 갈등과 자본주의를 비판한 ‘공산당 선언’을 런던에서 발표하고, 1867년 ‘자본론’ 제1권을 내놓는다. 그의 곁에는 임종까지 지켜준 평생의 귀인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있었다. 마르크스의 사후 엥겔스는 ‘자본론’ 제2권(1893)과 제3권(1894)을 내놓았다. 20세기 마르크스의 사상은 왜곡된 형태로 소비에트와 중국의 공산주의 혁명의 기초가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냉전체제가 지속되면서 지역에 따라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논의는 금기시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후 1989년 베를린 장벽의 붕괴와 1991년 소련의 해체로 공산주의가 자본주의에 패한 것으로 드러나면서 다시 세상 밖으로 나온다. 자본주의는 역사의 한 장으로 사라질 것이고, 인류사회는 결국 공산주의와 사회주의로 갈 것이라는 그의 예측이 빗나간 것으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2008년 영국 BBC의 설문조사에 의하면, 지난 1,000년 동안 가장 위대한 업적의 철학자, 그리고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철학자로 둘 다 마르크스가 1위로 꼽혔다.

물질적 성장과 더불어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를 탄생시킨 1차 산업혁명은 산업화에 앞서간 국가가 세계사의 주역이 되었고, 그 과정에서 개방과 혁신은 불가결의 요소였으며, 국가 간의 협력과 상생의 정신이 국제평화의 조건임을 깨우쳐주고 있다. 4차 산업혁명은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 인류사회는 역사에서 무엇을 배우고 있는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