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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8호 2019년 9월] 문화 나의 취미

4개 언어 마스터·운동·미니어처 술병…‘취미 부자’

김원곤 모교 의학과 명예교수


4개 언어 마스터·운동·미니어처 술병…‘취미 부자’



김원곤 모교 의학과 명예교수



“취미가 워낙 많으셔서요, 어떤 것을 조명하면 좋을까요.” “허허허, 뭐든 좋습니다. 마음대로 하시죠.”

전화 너머 김원곤(의학72-78) 모교 의학과 명예교수의 목소리엔 ‘어떤 취미에 관해 얘기해도 좋다’는 자신감이 묻어났다. ‘몸짱 의사’ ‘중년에 4개 국어 마스터’ ‘영화광’ ‘미니어처 술병 수집가’…. 흉부외과 명의로서뿐만 아니라 취미로 명성이 높은 그다.

단순히 취미의 가짓수가 많아서가 아니다. 중년의 나이에 여러 가지 취미를 동시에, 꾸준히 즐기며 일정 경지에 올려놓고 책까지 냈다. ‘20대가 부러워하는 중년의 몸만들기’ ‘영화 속의 흉부외과’ ‘파란만장 중년의 4개 외국어 도전기’ ‘닥터 미니어처의 아는 만큼 맛있는 술’ ‘세계 지도자와 술’ 등. 여덟 권 남짓한 흉부외과 분야 전문 서적에 이은 그의 저서 리스트다.


지난 8월엔 모교에서 정년퇴임하는 기념으로 단련된 근육이 돋보이는 세미누드 사진집을 냈다. 운동을 좋아해 의대 재학시절 의·치대 역도부를 만들었고 ‘체육교육과로 전과하라’는 농을 들을 정도였던 그는 60대 나이에도 ‘초콜릿 복근’을 유지 중이다. 9월 2일 서초동 한 미팅룸에서 진행한 인터뷰는 자연스레 그 많은 취미를 꾸준하게 즐기는 법에 대한 대화가 됐다. “한 번 곁에 온 것은 버리지 않는 성격 덕인 것 같다”고 운을 떼더니 숨가쁘게 정년 이후의 계획을 꺼내놓았다.

“정년 후 훨씬 더 강한 도전 의식이 생겼습니다. 몇 해 전 프랑스어, 스페인어, 일본어, 중국어 각각의 고급 능력 자격증을 취득했는데 내년 3월부터 약 2년 남짓 해당 언어권 국가들에 머무르며 공부할 계획이에요. 단순한 ‘몇 달 살기’가 아니라 더 치열합니다. 3개월은 스페인에 갔다가 한국에서 3개월 재충전하고, 다음 3개월엔 프랑스어권에 갔다가 돌아와 3개월을 쉬는 식이죠. 현지 어학원에 등록해서 독하게 하고 올 겁니다. 요즘 준비하느라 바쁜데 흥분감과 기대감이 겹쳐 매일 엔도르핀이 분출하고 있어요.”

“외국어 실력을 유지하기 위해 한가하다는 생각을 할 겨를조차 없다”는 그다. 언어 간의 간섭을 극복하기 위해 네 언어를 매일 조금씩 번갈아 공부하고 있다. 3개월 간격으로 네 개 언어의 자격증을 딸 때부터 습관이 된 패턴이다. 동시에 일주일에 4일 정도 유산소와 무산소 운동을 하며 몸을 단련한다.

“운동과 어학 공부란 게 잔인해요. 잠시만 멈춰도 완전히 무너지죠. 먹고 사는 데 관계 없는 취미여서 유지하기 더 어렵지만 오히려 나이 들어서 더 큰 목표를 세울 수 있는 바탕이 됐습니다. 덕분에 사는 게 행복하고 즐거워요.”



김 동문이 지난 8월 정년 기념으로 낸 세미누드 사진집(출처 김원곤 동문의 블로그).



결과가 증명하고 있지만 공연한 의구심에 의심 섞인 질문이 계속됐다. “잠은 몇 시간 주무시나요.” “보통 사람들과 같아요. 6~7시간.” “4개 국어 공부만 하기도 시간이 모자랄 텐데?” “병행 가능합니다. 단어를 외우고 체육관에 가서 세트 사이마다 되새겨요. 기억이 안 나면 운동을 마치고 돌아가서 확인하고요.”

운동과 어학은 시너지를 낼 수 있다 쳐도 ‘애주가’인 것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술만 먹어도 운동이 도로아미타불이 되지 않나. 그 질문에도 “아무 상관 없다”고 잘라 말했다. “목표 의식을 정확하게 가져야 해요. 자신이 왜 이걸 하고 있는지. 운동선수처럼 운동이 삶의 목표라면 모든 걸 희생하고 정진할 수 있겠죠. 저에겐 운동만큼 술도 중요한 부분이고 그래서 평생 할 수 있는 겁니다. 술을 좋아해서 출퇴근길 지하철을 타고, 그 틈에 사전을 보며 단어를 외워요. 다 삶을 윤택하게 하기 위한 도구들인데 무엇 때문에 하나를 포기하고 서로 충돌시킬 필요가 없습니다.”

이어 휴식 삼아 둔다는 바둑 이야기를 꺼냈다. “바둑 해설에서 ‘먼저 둔 돌에 체면이 서지 않는 수’라는 말을 해요. 재밌는 표현이죠? 언어를 취미로 공부해 고급 시험에 합격한 데서 만족할 수도 있죠. 하지만 그러기엔 ‘지금까지 둔 돌’에 체면이 서지 않는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어학 공부도, 운동도 계속 도전하는 겁니다. 모두 살면서 한번쯤 노력해본 일이 있을 거예요. 그 돌의 체면을 위해서라도 지금 나태해선 안 됩니다.”


애주가인 김 동문은 1,500여 개의 미니어처 술병을 소장 중이다. 소장품 일부인 위스키병 미니어처. (출처 김원곤 동문의 블로그)



공공연히 밝혀온 그의 버킷리스트에서 외국어시험 합격과 몸 사진집 출간을 이루고 이제 단 두 개가 남았다. ‘술집에서 일주일 근무해보기, 손녀와 여행하기’. 이 중 하나는 언제든 가능하고, 하나는 “내 노력과 무관하다”며 웃는 그다. 모교에서 보낸 시간에 대해서는 “즐겁고 보람됐다”고 돌아봤다. 정년식 다음날인 8월 31일 모교 병원에서 마지막 수술을 마쳤다. “수술장을 나올 때 진짜 마지막이구나 싶어 기분이 묘하더군요. 집에 돌아가니 아내와 작은아들이 제 얼굴이 그려진 케이크를 준비해 깜짝 파티를 해줬습니다. 은퇴 후 새로 태어난 기분으로 매진해 달라고 초 하나를 꽂아서요. 평소 천상병의 시 ‘귀천’의 구절을 좋아해요. 언젠가 삶의 소풍이 끝나는 날, ‘많이 보고, 느끼고, 배웠다’고 자족할 수 있는 생활을 하려 합니다.”

박수진 기자



김 동문의 취미생활을 기록한 블로그 blog.naver.com/skwong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