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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7호 2019년 8월] 오피니언 동문칼럼

신뢰의 위기, 선진국 가는 길 걸림돌이다

정병석 한양대 경제학부 특임교수

신뢰의 위기, 선진국 가는 길 걸림돌이다


정병석

무역72-76
한양대 경제학부 특임교수



‘다른 사람들을 신뢰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한국 사람들은 26.6%만이 그렇다고 응답한다. 이러한 조사결과는 OECD 35개 회원국 중 23위에 해당하는 낮은 수준이다. 한국은 가족 이외에 다른 사람을 신뢰하지 못하는 사회이다. 신뢰가 부족하다는 것은 서로를 믿지 못하는 것인데 무엇이 문제일까. 가장 큰 원인은 사람들이 사회의 공통 규범을 잘 지키지 않은 데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한다.

규범이란 법령이나 규칙, 계약 등 사회적으로 지켜야 할 약속이다. 우리는 사회생활을 하면서 이런 규범을 존중하고 반드시 지켜야겠다는 인식이 아직 미흡하다. 엄정하게 법적 규율하기보다 적당주의, 온정주의가 만연한다.

규범을 존중하거나 지키지 않는 사람이 많고 위반자에 대한 제재가 솜방망이 같이 미약하니 상대방이 성실하게 지킬 것이라는 믿음이 없다. 그래서 신뢰가 없다. 원칙대로 규범을 지키는 사람이 바보같이 손해 본다는 의식이 강하다.

신뢰가 높은 사회에서는 거래비용이 적게 든다. 미리 정해진 절차와 요건을 성실하게 준수하여 거래한다면 당연히 시간과 비용이 절약되고 생산적이다. 시장경제가 발달하기 위해서 높은 신뢰가 필요한 것은 이러한 요인 때문이다. 신뢰사회는 조직의 하부를 믿고 권한을 대폭 위임하고 담당자에게 법적인 권한을 마음껏 발휘하도록 허용한다. 어떤 일을 일단 맡기게 되면 그 사람의 역량을 믿고 기다려 준다. 신뢰와 권한위임이 있어야 역량을 제대로 발휘하고 조직을 발전시킬 수 있다. 이것이 신뢰의 힘이다.

우리나라는 시장경제체제를 기반으로 경제규모에서 세계 10위권의 국가로 도약했다. 그런데 아직 시장경제의 핵심가치인 재산권보장이나 계약, 규범의 준수에 대한 관념이 약하다. 시장경제는 자유로운 계약과 신뢰를 기반으로 하는데 우리는 계약을 성실하게 이행하는지, 계약위반자에게 그에 상응한 벌칙이 사회적으로 주어지는지에 대한 관심이 적다.

요새는 식당이나 상품거래 뿐 아니라 관공서 등 모든 활동이 관계 당사자로부터 평가를 받는다. 우버나 에어비앤비 등 공유경제는 이용자와 참가자 등의 상호 신뢰를 바탕으로 작동한다. 새로운 플랫폼 사회에서 신뢰가 더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이런 면에서도 신뢰가 낮은 한국사회는 취약하다.

격동기 한국사회는 위기에 직면해 있다. 그 원인은 경제력 향상에 상응하여 신뢰 등 사회문화가 선진화되지 못하고 경제와 문화의 괴리가 커진 데에 있다. 뒤처진 문화가 시장경제의 원활한 작동과 국가발전을 발목잡는 상황이다.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다. 법령은 말할 것도 없고 우리 주변의 생활규범, 계약 등을 성실히 지켜야 하며 성실히 준수하는 사람을 존중하고 위반하거나 평판 나쁜 사람을 제재하는 문화를 만들자. 우리가 진정한 선진국이 되기 위해서는 신뢰문화를 정착시키는 것이 급선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