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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7호 2019년 8월] 기고 에세이

녹두거리에서: 대학 때 만난 세 사람

권성우 숙명여대 한국어문학부 교수·문학평론가


대학 때 만난 세 사람



권성우
국문82-86
숙명여대 한국어문학부 교수·문학평론가



누구나 대학 시절을 회고하면, 아련하게 떠오르는 책이 있으리라. 내게는 최인훈 작가의 장편소설 ‘회색인’이 그런 책이다. 어느 날 ‘회색인’을 밤새워 읽으면서, ‘아 한국소설 중에도 이토록 지성과 매력, 품격을 갖춘 소설이 있구나’ 하는 생각을 했더랬다. ‘회색인’의 주인공 독고준의 캐릭터에 매료되어, 마치 내가 이 시대의 독고준 비슷한 존재라고 생각하며 대학교 3, 4학년 시절을 보냈던 것 같다. 지금은 제주조각공원 대표로 있는 국문과 동기생 이성훈과 함께 늘 우리는 ‘회색인’ 같다는 얘기를 나누며, 인문대 앞의 자하연에서 최인훈 작가와 ‘회색인’에 대해 함께 대화를 나누었던 추억이 눈에 선하다. 우리가 대학 시절 이후, 35년에 가까운 기나긴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도 깊은 우정을 유지하고 있는 건 무엇보다 ‘회색인’과 최인훈에 대한 깊은 공감 때문이지 싶다.

당시 우리는 전두환 군부독재에 대해 분노와 절망을 느끼고 있었지만, 학생운동에 모든 것을 걸 용기는 없었다. 그렇다고 시대적 현실을 모른 척하며, 적당히 고시 공부나 취업 준비에 몰두하기에는 우리는 역사와 지성, 사회 현실에 대한 관심이 너무 컸던 터였다. 그 어느 쪽에도 속하지 못하고 혁명과 취업 사이에서 묵묵히 문학 공부를 하던 우리의 존재 자체가 4·19를 앞두고 혁명과 사랑 사이에서 방황했던 독고준의 존재, 즉 ‘회색인’의 정체성과 비슷하다고 느꼈다. ‘회색인’이 만들어준 우정이었다. 그 이후 우리는 학과에서 누구보다도 친한 친구가 되어 함께 문학 세미나도 하고 술도 마시며 우정을 쌓았다.

졸업을 앞둔 1985년 가을, 우리는 국문과 김윤식 교수의 강의를 함께 들으며 비평 공부를 둘러싼 엄청난 매혹과 지적 호기심을 느꼈다. 다른 어떤 공부에서도 찾지 못했던 고도의 지성과 섬세함, 독특한 열정을 비평을 통해 만났다. 그렇기에, 공부를 하면 할수록 문학평론이 생각보다 너무 매력적이라는 생각을 하며 성훈과 서울대 ‘대학문학상’ 평론 부문에 함께 응모했으리라. 대학을 떠나기 전에 뭔가 추억을 남기고 싶다는 생각도 작용했다. 어쩌다 보니 평론 부문에는 우리의 응모작 두 편만이 응모됐다. 당선이라는 행운은 내 쪽이었다. 미안한 마음에 상금으로 성훈에게 술을 샀던 시간, 내게 진심 어린 축하의 마음을 전하던 성훈의 표정이 기억에 남아 있다.

‘대학문학상’ 평론 부문의 심사위원은 당시 최고의 문학평론가로 회자되던 불문과 김 현 선생이었다. 당선작이 결정된 후, 당신은 나를 연구실로 부르셨다. 웬만한 신춘문예 당선작 못지않다며 내게 어떤 일이 있어도 앞으로 글쓰기를 계속하라는 조언과 당부를 건네주셨다. 당신의 연구실을 조용히 퍼져나가던 그 따뜻한 목소리와 정갈한 분위기를 기억한다. 아마 그 순간이 글 쓰는 사람으로서의 내 운명을 결정했지 싶다.



일러스트 소여정(디자인09-13) 동문



김 현 선생의 조언과 더불어 시인 기형도의 시 표현처럼 “대학을 떠나기가 두려웠(던)” 나는 그 시간 이후 관악에서 십여 년의 세월을 더 보냈다. 대학문학상을 받은 지, 34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도 나는 대학 강의실에서 대학생들과 함께 최인훈을 읽는다.

내 대학 시절을 지배한 세 사람, 최인훈, 김윤식, 김 현 선생은 이제 모두 밤하늘의 별이 되었다. 1990년 6월 김 현 선생께서 먼저 세상을 뜨신 지, 28년 만인 2018년 그의 오랜 문우이던 최인훈 작가와 비평가 김윤식 선생도 고인이 되셨다.

생각해 보니, 세 사람의 글, 강의, 목소리와 함께 한 내 대학 시절이 얼마나 커다란 행운과 축복이었는지 알겠다. 당신들이 존재하지 않는 이 세계는 참으로 쓸쓸하다. 당신들과 함께 한 대학 시절의 추억은 앞으로 남은 내 인생의 영원한 자산이리라.




*권 동문은 문학평론가이자 숙명여대 한국어문학부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1985년 서울대 대학신문이 주관하는 대학문학상에 이문열론이 당선되며 문학비평을 시작했고, 198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평론 부문에 당선해 등단했다. 저서로 '비평의 매혹', '낭만적 망명', '비평의 고독' 등이 있다.

'비평의 고독'에서 권 동문은 "통상적인 의미의 고독과는 다른 의미에서 비평은 숙명적으로 고독한 글쓰기일 수밖에 없다"며 "그 고독을 견디는 마음이 좋은 비평을 낳는다고 믿는다"고 말했다. 이 비평집으로 2017년 임화문학예술상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