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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3호 2019년 4월] 오피니언 동문칼럼

이준구 모교 경제학부 명예교수 칼럼

금수저와 흙수저

명사칼럼


금수저와 흙수저




이준구

경제68-72

모교 경제학부 명예교수


요즈음 우리 주변에서 금수저니 흙수저니 하는 말들을 자주 듣는다. 우리 사회의 소득계층 간 이동성이 눈에 띄게 줄어든 데서 나타난 현상인 게 분명하다. “개천에서 용 났다”고 말하는 성공신화의 사례가 점차 찾아보기 힘들게 된 건 사실이다. 그러다 보니 이제는 어느 가정에서 태어났는지가 한 사람의 인생을 좌우한다는 인식이 점차 보편화되어 가고 있다. ‘흙수저’라는 말에서 부모의 경제적 뒷받침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의 짙은 좌절감을 읽을 수 있다.


또한 젊은이들이 즐겨 쓰는 말 중에 ‘이생망’과 ‘n포세대’라는 것도 있다. 이생망은 “이번 생은 망했다”는 말인데, 흙수저라는 말보다 훨씬 더 큰 좌절감이 녹아들어가 있어 듣는 사람을 섬뜩하게 만든다. 뿐만 아니라 취업, 결혼, 출산, 내 집 마련 등 포기해야 할 것이 너무 많다는 n포세대라는 말도 섬뜩하기는 마찬가지다. 이생망이니 n포세대니 하는 말들을 스스럼없이 주고받는 젊은이들을 바라보는 심정이 결코 편안하지 못하다.


부모로서 혹은 선생으로서 그들이 용기를 내어 난관을 돌파해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그러나 이 일이 결코 말처럼 쉽지 않다는 데 문제가 있다. 스스로를 개천에서 용 난 사람으로 자처하는 자수성가형 인사들은 그것이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 해낼 수 있는 일이라고 믿는 것 같다. 엄청나게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스스로의 재능과 노력을 통해 오늘날의 성공을 일궈냈다고 뽐내는 사람들을 자주 본다. 그런 사람들에게 흙수저 물고 태어났다고 징징거리는 모습은 철부지의 어리광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자수성가형 사람들이 오늘의 성공을 거둔 게 순전히 자신의 재능과 노력만의 결과일까? 그들은 그렇게 믿고 싶어 할지 모르지만 사실은 그게 절대로 아니다. 그들이 성공을 거둔 배경에는 삶의 이런저런 단계에서 맞게 된 ‘행운’이 크게 작용했을 것이 틀림없다. 아무리 열심히 노력한 사람이라도 한 순간의 불운 때문에 노숙자 신세로 전락한 경우를 너무나도 많이 볼 수 있지 않은가? 우리 삶에서 운은 재능과 노력 못지않게 중요한 성공의 요인이라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엄밀하게 따져보면 그 사람들을 성공으로 이끈 비결인 재능과 노력도 실제로는 운의 결과다. IQ로 대표되는 인지적 능력을 위시한 각종 능력이 유전적 요인에 많은 영향을 받는다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심리학자들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IQ의 차이에서 유전적 요인으로 설명할 수 있는 부분이 대략 절반 정도다. 나머지 절반은 교육적 환경에 의해 결정된다고 보는데, 이것 역시 어떤 가정에서 태어났느냐에 크게 영향을 받는다. 뿐만 아니라 노력하는 자세 역시 유전적 요인과 교육적 환경에 크게 영향을 받는다는 데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렇다면 개천에서 용 난 사람은 사실 무지하게 운이 좋은 경우라는 말이 된다. 스스로의 재능과 노력만으로 난관을 극복했다고 뽐내지만, 사실은 부모 잘 만나서 그런 자질을 갖추게 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들은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사실은 ‘보이지 않는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셈이다. 이 세상에 어떤 부모 밑에서 태어날 것인지를 선택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보이지 않는 금수저를 물고 태어나 개천에서 난 용이 된 사람은 이 출생의 로또에서 운 좋게 좋은 번호를 뽑아 든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


이와 똑같은 논리를 아주 가난한 사람에게도 적용해 본다면, 그들은 무척 운이 나쁜 사람들이다. 가난할 뿐 아니라 유전적 요인이나 교육적 환경도 나쁜 가정에서 태어나는 불운 때문에 일생 동안 어려운 삶을 이어가고 있는 셈이니 말이다. 사람의 삶이 어떤 가정에서 태어났느냐에 의해 크게 좌우된다는 것은 서글프지만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어떻게 성장해 가느냐에 따라 삶의 경로에 어느 정도의 차이가 생기는 것은 사실이지만, 태어날 때부터 안고 있는 핸디캡을 극복하는 것은 너무나도 어려운 일이다.


우파 경제학자의 대변인 격인 밀튼 프리드먼(Milton Friedman)은 재분배정책에 반대하며 이런 말을 하고 있다. “재분배정책은 열심히 일하고 열심히 저축, 투자한 사람에게서 돈을 거둬 열심히 놀고 열심히 써버린 사람에게 나눠주는 것이다.” 그의 말에서 빈곤한 사람을 바라보는 그의 차가운 시선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빈곤의 책임이 모두 그 본인에 있다는 그의 믿음을 읽을 수 있다. 나는 그의 이 말에 전혀 동감할 수 없다. 그는 빈곤 현상을 단지 피상적으로 관찰한 결과에 기초해 이런 말을 하고 있을 뿐이다. 


그동안 우리 사회에서 교육은 중요한 계층 상승의 사다리 역할을 해왔다. 보이지 않는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수많은 사람들이 바로 그 사다리를 타고 계층 상승의 꿈을 이룰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교육이 오히려 계층 간 이동을 막는 장애물 역할을 하는 쪽으로 변화하고 있다. 부모의 경제적 도움을 받지 못하면 보이지 않는 금수저를 물고 태어났다 하더라도 그 잠재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 바로 이런 숨 막히는 답답한 분위기에서 이생망 같은 섬뜩한 말이 나온 게 아닐까?


교육이 더 이상 계층 상승의 사다리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된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중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바로 대학입시제도라고 본다. 우리 사회에서 모든 교육이 대학 입시제도에 그 초점이 맞춰져 있는 게 사실이기 때문이다. 우리 서울대학교의 입시제도는 이 점에서 볼 때 과연 어떤 평가를 받을 수 있을까? 우리는 국가에서 많은 예산을 지원 받고 있는 국립대학법인이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대학과는 다른 입장에서 입시제도를 설계해야 마땅한 일이라고 믿는다. 어떻게 하면 좀 더 바람직한 사회를 만드는 데 기여할 수 있느냐에 대한 치열한 고민은 우리에게 주어진 숙명이라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