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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3호 2019년 4월] 뉴스 기획

차국헌 공대학장 특별인터뷰: “AI기술이 단대 간 칸막이 허물어…종합대학의 힘 발휘할 기회다”

지난 4월 별세 김정식 동문 기부한 500억 힘입어 해동AI기술원 건립 추진

“AI기술이 단대 간 칸막이 허물어…종합대학의 힘 발휘할 기회다”

차국헌 공대학장





김정식 동문 기부한 500억
해동AI기술원 건립 추진

퍼스트무버 전략 실현 위해
실패 용인하는 문화 세워야



“지난해 9월 김정식 회장님이 생애 마지막으로 의미 있는 기부를 하고 싶다며 저를 찾아오셨습니다. 당시엔 200억원 정도 약속하셨죠. 그러다 올해 초 저를 불러 앉히시곤 ‘내가 기부를 조금 더 할 수 있을 것 같으니 액수를 좀 올려보시게’ 하시는 거예요. 얼마를 생각하고 계시는지 감도 못 잡고 있다가 ‘500억원을 제안하면 300억원 정도 받지 않을까’ 해서 500억원을 써냈습니다. 그런데 덜컥 500억원을 기부해주신 거예요. 저도 무척 놀랐습니다.”

김정식(전자공학48-56) 대덕전자 회장이 지난 4월 11일 노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자신의 운명을 예감이나 한 듯 최근 모교에 500억원이란 거액을 기부해 화제가 됐었다. 서울대는 김 회장의 기부에 힘입어 2022년 개관 목표로 ‘해동AI기술원’을 관악캠퍼스 내에 신설한다. 303동 신공학관 쪽과 39동 인근 대학원연구동 쪽, 두 곳을 후보지로 두고 기획설계 중이다. 해동AI기술원은 인문계·이공계 구분 없이 AI기술을 플랫폼으로 교류·연구하는 공간으로 활용될 예정이다. 차국헌(화학공학77-81) 모교 공대학장을 지난 4월 2일 만나 이번 기부의 의미와 서울공대의 비전에 대해 들었다.

“해동AI기술원은 소프트웨어 친화적인, 완전히 새로운 개념의 시설이 될 것입니다. 공간이 엄격하게 구획된 기존의 딱딱한 건물에서 벗어나 학과는 물론 단과대학의 경계도 허물어, 아이디어를 중심으로 상호작용하는 열린 공간이 될 거예요. 모두가 4차 산업혁명을 얘기하고 AI 연구를 하겠다고 하지만, 말만 무성할 뿐 행동으로 옮기는 대학은 많지 않습니다. 아직 아무도 해본 적이 없으니 어떻게 해야 될지를 모르는 거죠. 설혹 실패하더라도 서울대가 본교에 주어진 사명을 완수한다는 자세로 먼저 시도하는 겁니다. 김정식 회장님의 기부가 그 물꼬를 터준 셈이죠.”

엄청난 돈을 기부 받은 만큼 차 학장의 어깨도 무겁다. 대학이 국가와 기업 경쟁력의 ‘젖줄’ 역할을 한다는 게 그의 지론. 4차 산업혁명 시대가 도래하고 우리나라 산업이 ‘패스트 팔로어’ 전략으론 더 이상 발전할 수 없게 된 지금 ‘퍼스트 무버’로 도약하려면 ‘성실한 실패’를 용인하고 재도전의 기회를 주는 것을 당연시하는 의식의 개혁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한국전쟁 이후 우리나라가 성장할 땐 ‘추격형’ 전략을 썼죠. 30~40년 앞서 가고 있는 나라들이 모델이 돼주니까 답이 있었어요. 덕분에 한국 산업이 단시간에 기적적으로 발전했습니다. 이젠 우리 스스로 답을 찾아야 하는 시대가 온 거예요. 창업에 성공하신 분들 보면 대개 열에 여덟 번 이상 실패하잖아요. 나머지 한두 번이 성공하는 거죠. 실패하더라도 성실히 실패하면 그게 자산이 되고 더 큰 성공의 씨앗이 되는 거예요. 앞서 가는 나라 쫓아갈 땐 실패를 피할 수 있어요. 베끼면 되니까. 그러나 ‘선도형’ 전략으로 가려면 한번 실패했다고 영원한 패배자인 것처럼 낙인찍어선 안 됩니다.”

오세정 총장은 물론 김정식 회장 또한 본지(492호 2면) 및 타 언론 매체(전자신문 3월 4일자)와의 인터뷰에서 ‘패스트 팔로어의 지양과 퍼스트 무버로의 지향’이란 취지로 발언한 바 있다. 학장과 총장, 모교와 동문 간에 깊은 공감대가 형성돼 있음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차 학장은 김 회장의 아들인 김영재(공업화학77-81) 대덕전자 사장과 모교 동기이기도 하고, 김 회장이 모교 전자정보공학부와 화학생물공학부에 하나씩 해동학술정보실을 설치해줬을 때 당시 화학생물공학부 학부장으로서 탁월한 운영성과를 보여 김 회장의 신뢰가 두터웠다. 또한 차 학장은 오 총장이 2014년 제26대 모교 총장 후보로 입후보했을 때 선거를 돕기도 했으며, 나란히 모교 동문이 되기 이전부터 같은 동네에 거주해 친분이 있었다. 공부깨나 했던 차 학장에게도 오 총장은 ‘우상’이었다고.

“공대를 포함한 우리 서울대가 4차 산업혁명 핵심기술들을 연구, 발전시켜 대한민국 산업의 성장 돌파구를 마련해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이점에선 오세정 총장님과 제가 인식을 같이 합니다. 과거의 평판에 얽매이기만 해선 서울대가 살아남을 수 없거든요. 해동아이디어팩토리와 기술창업플라자 그리고 이번에 신설되는 해동AI기술원을 거점으로 기술 창업을 활성화시키고 그 힘으로 서울대 후문 연구공원에서 낙성대공원에 이르는 800m 거리를 ‘관악 AI밸리’로 조성하여 스타트업 생태계를 구축하는 ‘큰 그림’을 본부 기획처와 협조하여 진행하고 있습니다. 모교 창업가들이 둥지도 틀고 네이버, 다음 같은 국내 기업은 물론 구글, 아마존, 페이스북 등 글로벌 기업에도 문호를 열어 ‘한국판 실리콘밸리’로 발전시키는 원대한 도전이죠. 관악구 나아가 서울시와 대한민국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어줄 것으로 기대합니다.”

단편적이고 근시안적인 성과만 추구해선 비전이 없다고 판단한 차 학장은 지난 2017년 9월 부임 직후부터 모교 재학생들의 IT역량 강화에 착수했다. 공대 공통과목으로 IAB와 CSB를 개설하고 공대생뿐 아니라 모든 재학생에게 개방하는 계획을 세운 것.

IAB는 사물인터넷(IoT)과 인공지능(AI), 빅데이터(Big data)에 대해 배우는 과목으로 플립러닝을 적용, 8명의 교수가 팀티칭을 하되 학생이 집에서 먼저 이론을 공부하고 학교에선 컴퓨터 실습으로 공부한 내용을 응용해보는 수업이다. CSB는 사이버 시큐리티 앤 블록체인(Cyber Security and Block Chain)의 약자로 역시 플립러닝을 적용해 수업이 진행될 예정이다. 서울대 내에서만이라도 ‘AI 문맹’을 깨어 보다 다양한 연구가 자체적으로 발생되도록 저변을 넓혔다. 신학철(기계공학73-79) LG화학 부회장과 김기남(전자공학77-81) 삼성전자 부회장, 이석희(무기재료84-88) SK하이닉스 사장 등에게 해당 과목들을 소개했더니 모두 엄지를 추켜세웠다고.

산학협력 관련 최근 보도된 ‘반도체 계약학과’에 대해선 “오죽 인력이 모자랐으면 정부에서 삼성전자에 요청했겠나” 하면서도 “계약학과가 쉽게 통과될 거라 장담할 수 없다”고 말했다.

“채용조건이 학부 졸업생이라고 들었어요. 수도권 정원 억제정책에 의해 학부생 정원이 늘지 못하는 상황에서 필요성과 취지엔 공감합니다. 그러나 학부생은 원래 입학시험을 거쳐 뽑아왔기 때문에, 정원 외 계약학과 학부생 선발이라고 하면 이를 뒷받침할 학칙 개정이 필요합니다. 학내 여론 수렴 과정 또한 거쳐야 하고요. 제 개인적으론 삼성전자와 같은 단독 회사보단 모든 반도체 회사를 포함하는 계약학과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안팎에서 제기되는 ‘서울대 위기론’에 대해 차 학장은 “AI가 단과대학 간 장벽을 허물고 서로 융합시켜 모교가 종합대학으로서의 힘을 발휘할 기회가 왔다”고 말했다.

“예를 들어 카이스트나 포스텍 같은 과학기술특성화 대학은 공대와 자연대가 주축이 되고 인문사회 계통으론 일부 교양과목뿐입니다. 그런데 서울대는 인문대, 사회대, 음대, 미대까지 다 있죠. 예전엔 조직이 워낙 크다 보니, 변화가 느리고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구성원들을 설득하는 게 쉽지 않았는데, 지금은 위기의식을 공유하고 있고 AI를 통해 효율성도 도모할 수 있어 융합 및 시너지 효과를 기대해볼 만합니다. 꿰어야 보배가 되겠지만 우선 구슬 서 말은 갖췄다는 거죠. 4차 산업혁명이 기반이 되는 만큼 공대가 변화를 주도합니다. 다만 연구 범위를 넓게 잡아 타 단과대학이 함께 참여할 공간을 열어주고 있어요.

한 예로, 미대 금속공예학과와 공대 재료공학부가 협력해 재료의 성질에 대한 이해를 넓혀 더 다양한 작품을 만들기도 하고, 인문대 언어학과와 공대 컴퓨터공학부가 협력해 더욱 정교한 스마트스피커를 만들기도 하는 그런 식이죠. 시대의 변화에 대해 이러한 인식을 공유하고 함께 실천 방안을 찾아가는 데서, 우리 서울대가 다시 국민의 사랑을 받는 대학으로 거듭나는 한 걸음을 떼지 않을까 합니다.”


나경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