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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0호 2019년 1월] 오피니언 동문칼럼

소득주도성장 정책에 대한 이해와 오해

시장과 정부 상호 역할을 하는 포용적 모델로 가야
명사칼럼

소득주도성장 정책에 대한 이해와 오해

윤기향
법학65-69 
애틀랜틱대 종신교수


한국경제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있다. 한때는 백합화와 같이 찬연했던 한국경제가 지금은 시든 백합화의 꽃잎과 같이 생기를 잃어가고 있다. 문재인정부 들어서도 실업률이 치솟고 성장률이 떨어지는 등 한국경제는 오히려 뒷걸음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한국경제의 생기 잃은 모습은, 그러나, 어제 오늘에 생긴 문제는 아니다. 문재인정부의 소득주도성장 정책이 모두 덤터기를 뒤집어쓸 성질의 것은 더더욱 아니다. 증상은 그 이전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1990년대 중반부터 빛이 바래기 시작했다. 

문재인정부의 경제정책은 소득주도성장 정책의 바탕 위에 세워졌다. 거기에 최저임금 인상이 소득주도성장 정책의 골간을 이룬다. 소득주도성장 정책은 근로자의 소득이 증가하면 소비가 늘고, 소비가 활발해지면 기업의 생산이 늘어 경제성장이 촉진된다는 선순환을 그린다. 그러나 이러한 장밋빛 약속은 언제나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소득주도성장 정책은 다분히 케인스적인 정책 처방이다. 대공황이 한창일 때 케인스는 정부의 적극적인 개입을 통한 해결책을 제시했다. 케인스의 처방은 그 당시로서는 혁명적이었다. 케인스는 경제가 침체에 빠졌을 때 정부가 경제에 개입해서 고용을 늘리고 경제를 활성화하는 정책을 펼쳐야 한다는 이론을 제안한 것이다. 케인스 이전까지는 시장이 스스로 모든 경제 문제를 해결한다는 고전학파 이론이 160여 년 동안 지배했다. 케인스는 그 당시 정통파 경제이론인 자유방임주의에 반기를 든 것이다. 최저임금제가 대공황 때 도입되었고 뉴딜정책으로 미국 곳곳이 일자리 창출을 위한 공사판이 되었다. 

사실 정부가 재정지출을 늘려 일자리를 창출하고 소득을 증대시켜 경제를 활성화시키는 정책은 대공황이나 2008년의 글로벌 경제위기 때와 같은 상황에서는 약발이 먹힌다. 다시 말해 실제 경제성장률이 잠재성장률을 밑돌 때 그러한 정책은 바람직할 뿐만 아니라 필요하기까지 하다. 2008년 글로벌 경제위기 때 미국의 실제성장률은 잠재성장률(3.3%~3.5%) 밑으로 크게 떨어졌다. 마지막 임기의 부시행정부(7,000억 달러)와 오바마행정부(7,850억 달러)는 경제 살리기 작전의 일환으로 천문학적인 돈을 쏟아 부었다. 중앙은행인 연준도 2008년 12월에 기준금리를 0% 수준으로 낮추었다. 또한 연준 100년의 역사에서 한 번도 사용해보지 않은 양적완화 조치를 세 차례에 걸쳐 사용하기도 하였다. 오바마정부의 시장개입과 연준의 유례없는 양적완화 조치로 미국의 대침체도 2010년 10월에 공식 종료되었다. 

그러나 정부의 적극적인 시장개입 정책은 조자룡의 헌 칼 쓰듯이 언제나 위력을 발휘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한 정책은 실제성장률이 잠재성장률 밑으로 떨어져 실업이 늘고 생산이 줄어들 때 효과를 볼 수 있다. 한국경제가 현재 당면하고 있는 문제점은 성장률의 둔화가 잠재성장률의 하락과 맞물려 있다는 점이다. 한국의 실제성장률이 2~3%대로 떨어진 것은 잠재성장률이 그 수준으로 낮아졌기 때문이다. 잠재성장률을 끌어올리는 것이 한국경제의 당면 과제이다. 하지만 소득주도성장 정책은 잠재성장률 자체를 끌어올리는 데에는 역부족이다. 그동안 문재인정부가 추진해온 소득주도성장 정책이 성공하지 못한 것도 이 때문이다. 잠재성장률은 한 나라가 인플레이션을 유발하지 않고 달성할 수 있는 최대의 경제성장률이다. 잠재성장률은 노동의 증가, 자본의 증가(투자), 그리고 기술혁신에 의해서 결정된다. 

한국의 잠재성장률은 60~70년대만 하더라도 7~8%대에 달했다. 그러나 질주하던 한국경제에 90년대 중반 이후부터 제동이 걸리기 시작했다. 노동증가율과 자본증가율이 거의 반 토막으로 줄어들었다. 저출산과 고령화의 여파로 노동증가율이 많이 둔화되었으며 자본의 축적으로 투자수익률도 많이 떨어졌다. 일부 산업을 제외하고는 기술혁신이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다. 그 결과 잠재성장률이 3.0~3.5%대로 낮아진 것이다. 

잠재성장률을 높이는 것이 한국경제의 과제라고 했지만 한국경제의 잠재성장률 3%대는 한국경제가 이제 선진국형 경제구조로 바뀌었음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이 수준의 성장률이 현재 한국경제가 인플레이션을 유발하지 않고 감당할 수 있는 정상 수준이다. 옛날의 영광에 젖어 성장률에 너무 집착할 경우 이는 과유불급이 될 수 있다. 

그렇다면 소득주도성장 정책은 실패한 정책으로서 폐기되어야 하는 것일까? 한국은 개인의 재산 축적에서 임금소득보다 자산소득의 비율이 월등히 높은 나라다. 소득주도성장 정책과 최저임금 인상은 소득불균형을 해소하는 데에는 여전히 바람직한 정책이다. 최저임금제는 부정적인 측면도 있지만 취약계층의 실질임금을 증대시키는 효과가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측면이 부정적인 측면보다 크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최저임금은 보통 시장에서 결정되는 균형임금보다 높게 책정되기 때문에 자원 배분을 왜곡시킬 수 있다. 취약 계층에 있는 근로자들을 보호하자는 취지에서 나온 제도이지만 최저임금제는 역설적으로 취약계층 근로자들의 취업에 걸림돌이 될 수 있다. 더구나 문재인정부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최저임금의 인상은 급진적이고 대폭적이어서 경제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 이와 같이 최저임금의 인상은 필요하지만 실질임금의 상승을 유발하는 정도로 속도를 조절할 필요가 있다.  

일부에서는 불필요한 소득주도성장 정책은 과감하게 버려야 할 때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은 경제의 흐름을 시장에 맡기자는 입장이다. 시장불개입주의의 극단적인 예는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키들랜드와 프레스콧이 인용한 사이렌의 비유이다. ‘오디세이’에 나오는 사이렌은 사람들이 다가갈 수 없는 산호초 밖에 살면서 아름다운 노래로 뱃사람들을 유혹했다. 오디세우스는 병사들의 귀를 막아 사이렌의 노랫소리를 듣지 못하게 했고 자기 자신을 돛대에 동여매 그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했다. 사이렌의 비유가 전하는 메시지는 오디세우스가 돛대에 묶인 채 강물 따라 흘러갔듯이 경제를 물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두라는 것이다.

‘자본주의 4.0’을 쓴 칼레츠키는 자본주의가 더욱 진화하기 위해서는 정부와 시장이 함께 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소득불균형이나 노동력의 감소와 같이 시장이 손댈 수 없는 문제는 정부가 개입해서 이를 해결하기 위한 정책을 펼치고, 투자 증대나 기술혁신과 같이 효율성에 의해서 영향을 받는 분야는 시장에 맡기는 ‘포용적 모델’이 시장경제 자본주의가 보다 높은 단계로 발전하기 위한 답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