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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gazine

[489호 2018년 12월] 기고 에세이

녹두거리에서: 여기는 로메공항

고선윤 작가


여기는 로메공항


고선윤

동양사84-88
작가


아프리카의 서쪽 부르키나파소에서 출발한 비행기가 다섯 시간 만에 착륙했다. 파리는 추울 것이라고 준비한 코트를 의자 밑에서 꺼냈다. 그런데 춥지가 않다. 불어로 몇 마디의 안내방송이 있고, 아무런 움직임이 없다. 이상하다. 아무도 움직이지 않는다. 한참 후에 다시 방송이 있고, 사람들이 주섬주섬 짐을 챙기고 일어섰다. 무슨 일이냐고 옆 사람에게 물어보지만 서로 서툰 영어라 갈팡질팡한다. 칠흑같이 어두운 밤, 스텝카를 밟고 내려오는데 뜨거운 밤바람이 느껴지고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파리의 겨울이 아니다. 뭔가 잘못되어도 크게 잘못 된 거 같다.

“교육을 통한 빈곤퇴치” 이런 거창한 슬로건을 가지고 아프리카를 찾아다닌 지 3년이 되었다. 내 새끼 챙긴다고 귀도 눈도 닫고 살다가, 막내를 대학에 보내고 나도 세상을 위해서 뭔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거라는 생각에 쫓아다녔다. 거금을 투자해서 학교를 짓는다거나 현장에서 직접 벽돌을 나르는 일은 할 수 없지만, 대한민국의 두툼한 배짱을 가진 사람의 역할 또한 분명 필요하다. 아프리카의 아무리 가난하고 어려운 나라라고 해도 행정기관이 있고, 질서와 규칙이 있다. 작은 건물 하나 짓기 위해서 족장으로부터 땅을 받았다고 해도 각종 행정기관을 찾아 등기를 쳐야 하고, 전기를 끌어와야 하는 숱한 일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기다린다. 젊은 사람들이 일을 잘할 수 있도록 뒤에서 시스템을 만드는 것은 역시 굵은 팔뚝의 이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스스로 자부하면서 따라다녔다. 고위층을 만나 떼를 쓰기도 하고, 한복을 입고 미인계로 밀어보기도 했다.

일이 어려운 것은 그 일의 본질에 있는 것이 아니다. 어떤 일이건 사람의 만남과 만남에서 이루어지는 고로 그것이 어려움이다. 마음고생도 적지 않았다. 같이 잘 해보자고 우리나라의 훌륭한 청년을 아프리카에 보내 일을 시켰더니 더 좋은 직장 구했다면서 떠나는 이가 없지 않나, 외롭고 힘들다면서 도망가는 이가 없지 않나, 충분히 이해는 되지만 젊은 사람들에 대한 섭섭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우리는 실컷 도와준다고 다가가지만 에어컨 빵빵한 방에서 거들먹거리는 기관장들을 만나면 미친 짓한다는 생각에 뒤도 돌아보기 싫을 때도 있었다. 교육입양한 아프리카의 아들놈이 의대에 합격했다면서 “컴퓨터 사주세요”라고 당당하게 요구했을 때는 기특하다고 해야 할지 뻔뻔하다고 해야 할지.

그래도 이것을 능가하는 기쁨이 있으니, 나는 다시 찾지 않을 수 없었다. 튼실한 머스마들이 다 떠난 자리 홀로 남아 프로젝트를 끝까지 수행하는 야무진 여학생이 있었고, 살아있는 닭을 한 마리 쥐어주면서 감사를 표하는 농부가 있었다. 이번에도 숙소의 청소부에게 내가 신던 슬리퍼를 주었더니 그 다음날 아프리카산 슬리퍼를 하나 사와 내 방 앞에 두고 갔다. 그녀에게는 엄청 비싼 물건이었을 것인데 말이다. 이렇게 만남에는 항상 감사가 따랐다.

일러스트 소여정(디자인09-13) 동문 



귀국길, 파리를 거쳐 귀국하는데, 비행기는 기상이상을 이유로 이웃나라 어딘가에 내렸다. 공항은 아수라장이었다. 비자를 위한 서류를 작성하면서, 비로소 여기가 토고의 로메 공항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공항 벤치에서 몇 시간을 보냈는지 모른다. 새벽 2시 어둠 속에서 공항 부근 호텔로 안내되었고, 커다란 열쇠를 하나 받았다. 국제미아가 되고도 무서움보다는 피곤함이 더하니, 참으로 다행이다. 그리 좋은 방은 아니었지만 더운 물이 펑펑 쏟아지니 이 얼마나 행복한지 모르겠다. 방울방울 떨어지는 물에 고양이 세수나 한 나는 욕조에 물을 받아 호사를 누렸다. 내일이면 비행기는 뜨겠지. 그래 즐길 수 있을 만큼 즐기자. 이래도 한평생 저래도 한평생.



*고 동문은 모교 동양사학과 졸업 후 한국외국어대에서 일본 헤이안시대의 문학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지금은 백석예술대 외국어학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칼럼을 쓰고 책을 저술하는 일에 전념하고 있다. ‘국경없는교육가회’ 멤버로 아프리카의 어린 아이들의 교육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최근 ‘고선윤의 일본이야기’, 두 번째 책 ‘나만의 도쿄’를 발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