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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5호 2018년 8월] 기고 에세이

동문기고: 외국어 실력

송상용 한림대 명예교수


외국어 실력




송상용
화학55-59·철학60-62
한림대 명예교수



페이스북의 저커버그가 베이징 칭화대 학생들과 중국어로 대화했다는 소식이 화제에 오르더니 함부르크 정상회담에 간 문재인 대통령이 베를린에서 메르켈 총리와 회담할 때 독일어로 인사를 나누었다고 한다. 경남고 다닐 때 독일어를 제2외국어로 택했기 때문이리라. 6·25 때 한국에 파견된 의료지원단을 찾아 방명록에 독일어로 쓴 “여러분이 베푼 도움은 잊지 않고 있다”(Ihre Hilfe bleibt unvergessen)는 말은 인상 깊다.


나는 중학교 2학년 때 한국전쟁이 터져 중·고등학교의 반 넘어를 시골에서 농사짓고 나무하며 보냈다. 1년 배우다 만 영어를 보충하려고 학원에 다녔다. 대전에서 미국공보원 영어학원(박태화 원장, 장기선 대전공고 강사)에서 영어 회화와 독본을 들었다. 환도 후 서울에서는 서울고등학관(강태평)과 ELI(서울고 안현필 교사)를 다녔다. 서울 대전종합고등학교에서 시작한 독어(허 혁 이대 교수)는 아카데미(강세형 국회의원, 김정진 모교 사대 교수)에서 회화와 독본을 택했다.


50년대 후반에 대학을 다녔다. 그때 문리과대학은 일본의 고등학교 비슷한 자유분방한 학풍이었다. 외국어에 대한 관심이 대단했다. 영어 이외에 외국어 두 과목을 듣는 것은 보통이었다. 화학을 전공한 내가 독문과 여덟 강좌(허형근)를 신청해 32 학점을 땄고 영문과 열 강좌(교양영어 포함, 권중휘, 박충집, 정인섭, 전제옥, 여석기, 송 욱, 이종구, 황찬호)와 불문과 한 강좌(김붕구)를 청강했다. 그때는 부전공 제도가 없었으나 생물학까지 합쳐 세 과목을 부전공한 셈이다. 초급불어는 CEF(이휘영, 방 곤)에서 배웠고 70년대 교양과정부에서 강의하면서 김광남(김 현)의 ‘프랑스 문명’ 강독을 청강했다. 러시아말은 80년대 고려대 여름학교에서 집중러시아어(김진원, 석영중)를 딸과 함께 청강했으나 고비를 넘기지 못했다.


내 친구 임석훈은 화학과 시 낭독 모임에서 베를렌느(Verlaine)의 시 ‘감상적 대화’(Colloque sentimental)를 읽었고 러시아말을 배우러 다녔지만 유학은 독일로 갔다. ‘맨발의 철학도’ 채현국은 칸트의 ‘순수이성비판’ 강독에서 서문 한 자락을 새겼고 야유회에서는 이브 몽탕이 히트 한 ‘고엽’을 프랑스말로 멋지게 불렀다. 그는 삼국지도 나관중의 원서로 읽었다. 내 제자 홍광엽(한림대 명예교수)은 경복고 학생 때 뉴욕 헤럴드 트리뷴 세계청년포럼에 참석했고 사병으로 수도경비사령부에서 복무할 때 전두환 대령에게 영어를 가르쳤다. 그는 파리대에서 정치학 국가박사 학위를 받았지만 유학중 민주화운동을 하면서 망명 때 고등학교에서 독일어를 가르쳤다.


나는 학생 때 독어 논문 두 편(화학, 철학)을 번역해 ‘문리대학보’에 실었고 니체의 시를 번역해 ‘새 세대’에 발표했다. 독어, 프랑스말 책을 읽어 논문도 여러 편 썼다. 한국사를 전공한 아내(김선곤·사학 57-61)는 한문, 일본말, 중국말을 새로 배워 쓴 졸업논문이 ‘역사학보’에 실렸다. 일본말을 제대로 못 읽는 나를 많이 도와 주고 여행 때는 통역도 해준다. 요즘 스위스에 사는 딸은 왜 그렇게 독일말을 못하느냐고 괴테학원에 등록하라고 한다. 그러나 50 넘어 러시아말을 배우려다 실패한 나는 움직일 생각이 없다. 아내는 이탈리아에 사는 외손주와 한글과 이탈리아 말을 카톡으로 함께 공부하고 있다. 재미로 하는 것이다. 요즘 학생들은 영어 회화는 잘 하나 제 2외국어는 거의 안 해 책도 못 읽으니 딱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