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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4호 2018년 7월] 기고 에세이

녹두거리에서: 학업과 인간관계, 뭣이 중한가?

이상원 모교 기초교육원 강의교수


학업과 인간관계, 뭣이 중한가?



이상원
가정관리87-91·노문91-95
모교 기초교육원 강의교수


일러스트 소여정(디자인09-13) 동문



학기 말의 ‘말하기와 토론’ 수업 시간이었다. 찬반 토론 주제로 ‘꿈을 이루기 위한 학업과 인간관계 중 어느 것이 대학생활에 더 중요한가?’가 등장했다. 토론 주제는 전적으로 학생들이 결정하고 선생인 나는 청중으로 참여하는 것이 이 수업의 방식이다. 토론을 시작하기에 앞서 사전 의견 개진 차원에서 청중들은 자리를 나누어 앉게 되었다. 학업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오른편으로, 인간관계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왼편으로.

나는 잠시 망설이다 왼편에 앉았다. 물론 학업과 인간관계는 모두 중요하다. 토론조 학생들도 그걸 모르는 바 아니었지만 찬반 논의를 위해 양자택일의 극단적 상황을 설정했던 것이다. 그날, 나를 제외한 청중은 열세 명이었다. 인간관계를 선택한 학생은 세 명인 반면 학업을 선택한 학생은 열 명이었다. 그 격차가 내게 일단 충격을 가했다.

토론이 시작되었다. 학업과 인간관계를 상징하는 가상 인물이 등장했다. 신입생 시절부터 강의실과 도서관만 오가며 공부에 매진해 매학기 장학금을 받고 성공적인 미래를 앞둔 ‘김독고’, 그리고 각종 모임과 행사에 빠지지 않으며 친구들 사이에서 인기를 누리지만 공부에 쓸 시간이 부족해 간신히 졸업이나 할 수준인 ‘이콜택’(이 이름은 콜택시에서 따온 것으로 부르면 늘 달려오는 사람이라는 의미였다)이었다.

여러 논의 중에 몇 가지만 소개해보자. 우선 김독고 측에 대한 이콜택 측 비판으로 꿈을 이루기 위해 성실하게 노력하는 것은 좋지만 사람이 홀로 이룰 수 있는 성과에는 한계가 있고 따라서 인간관계를 다루는 능력이 더 중요하다는 주장이 나왔다. 이콜택 측에 대한 김독고 측의 비판은 인간관계의 불안정성과 피로도를 지적하는 내용이었다. 과도한 인간관계는 결국 휩쓸리고 소모되는 삶을 만들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대학시절 이후 학업과 인간관계 중 어느 쪽 복원이 더 쉬운가에 대해서도 양측 의견이 대립했다. 김독고 측은 원하는 직업을 갖고 안정을 찾은 후 인간관계를 복원하면 된다고 했고 이콜택 측은 폭넓은 인간관계를 바탕으로 필요한 도움을 얻어 얼마든지 꿈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 했다. 모두 납득이 가는 얘기였다.
토론이 끝난 후 생각이 바뀐 청중은 자리를 바꿔 앉으라고 했다. 학업을 선택했던 학생 한 명이 인간관계 쪽으로 넘어와 학업 쪽 아홉, 인간관계 쪽 네 명이 되었다. 격차가 조금 줄었다고는 해도 여전히 학업이 대세였다. 학생들은 토론을 평가하면서 각자 처한 상황에 따라 양자택일이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예를 들어 법학대학원 입시를 준비하는 졸업반 학생은 현재로서는 학업을 선택할 수밖에 없지만 입장이 달라지면 선택도 바뀔 것이라고 말했다.

내가 학업 아닌 인간관계를 선택한 이유도 1987년 입학 후의 4년이 학업에 별 비중을 두지 않고 흘러갔다는 개인적 경험 때문이었던 것 같다. 졸업 후 그럭저럭 먹고살 수는 있다는 믿음이 퍼져 있던 때였다. 나는 강의실보다 동아리방이나 독서모임에서 보내는 시간이 더 많았고 학점을 잘 받아야 한다는 생각도 없었다. 학점을 위해 노력하는 학생들 자체가 내 주변엔 드물었다(유유상종이라 그랬을지도 모를 일이지만).

그런 경험 때문인지 과제와 시험으로 매일을 전쟁처럼 살아내는 지금 학생들을 보면서 나는 안타까움을 느낀다. 내가 겪은 것보다 훨씬 더 치열한 입시교육을 거친 후 다시 숨 돌릴 틈도 없이 다음 경쟁 단계에 돌입하는 상황이니 말이다. 인간적 교류의 모든 즐거움을 포기한 채 살아가는 김독고 측을 선택한 학생들의 모습이 그래서 충격적이었다.

그럭저럭 먹고살 수 있겠다는 믿음이 불가능해진 세상이 결국 문제의 원인인가 보다. 학생들과 나는 서로 다른 조건에서 학부 시절을 보내는 존재, 그리하여 서로를 온전히 이해하기는 어려운 존재라는 데까지 생각이 미치고 나니 어쩐지 씁쓸하다.




*이 동문은 2006년부터 서울대학교 기초교육원에서 강의교수로 일하며 ‘인문학 글쓰기’와 ‘말하기’ 강의를 하고 있다. 수강신청 시작과 동시에 마감될 정도로 인기 있는 글쓰기 강의 내용을 묶어 '서울대 인문학 글쓰기 강의'라는 책을 펴냈다. 모교 강의 외에도 다양한 강연을 통해 대중에게 글 잘 쓰는 방법을 알려주고 있다. 


모교 가정관리학과와 노어노문학과를 졸업하고 한국외대 통번역대학원에서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삼성전자 국제본부 직원, 한국외대 BK21 사업단 상임연구원을 거쳤다. 1999년부터 출판번역을 해왔으며, '시간을 정복한 남자 류비셰프', '성서 그리고 역사', '프리메이슨','숲 사람들' 등 60여 권의 번역서를 출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