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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1호 2018년 4월] 문화 미술산책

미술산책 <3> 네로와 루벤스

고전미술사 박사 조은정 교수가 그리스에서 들려주는 미술이야기


루벤스(Rubens)-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그리스도(The Descent from the Cross),

Oil on panel, 421x311cm, 1612-14. O.-L. Vrouwekathedraal, Antwerp



‘갑자기 강렬한 흰 광선이 어두운 통로를 비췄다. 달이 정점에 도달하면서 구름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쌓인 눈에 달빛이 반사되어 마치 새벽과 같이 환해졌다. 입구에 있던 소년은 높이 걸린 두 그림의 휘장을 잡아당겨 벗겼다. ‘십자가에 매달리는 그리스도’와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그리스도’가 눈앞에 드러났다. 소년은 그림을 향해 두 팔을 뻗었다. 황홀경에 빠진 창백한 얼굴 위로 열정적인 눈물이 반짝였다. “드디어 이 그림들을 보다니!” 소년이 외쳤다. “오 하느님, 이제 충분합니다!”’ <소설 플랜더스의 개 중>


이 19세기 영국 소설은 유독 우리나라에서 인기를 끌었는데, 1970년대 일본에서 각색한 TV 만화 덕분이었다. 필자 역시 네로와 파트라슈 때문에 울었던 기억이 있다. 뒤늦게 찾아 읽은 원작은 생각보다 슬프지 않았다. 나이가 들면서 주인공에 대한 공감 능력이 퇴화된 것인지, 아니면 미술품 앞에서 ‘이제 충분하다, 내 삶에서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고 선언할 정도로 강렬한 감동을 받은 적이 없었기 때문인지 모른다. 이 소설가가 앤트워프의 성당에서 루벤스의 제단화<위 그림>를 실제로 보았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오늘날 성당을 방문하는 대부분의 관광객들은 작품 자체에서 오는 미학적 쾌감보다도 ‘명작’을 목격했다는 뿌듯함을 더 크게 느끼는 듯하다. 필자와 같이 어린 시절의 만화를 회상하면서 반가워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우리는 미술작품을 여러 방식으로 만나고 다양하게 반응한다. 박물관과 미술관을 찾아가는 경험은 마치 유명 연예인들의 팬 미팅에 참여하는 것 같아서 다소 흥분되지만 사실 피곤하다. 사회적으로 큰 이슈가 되는 국제 비엔날레는 정치적 토론회와 비슷하다. 작가와 기획자는 적, 동지, 아니면 바보로서, 정작 미술작품은 뒷전이 되기 쉽다. 자식들이 잘 되기를 기원하는 동서양의 어머니들에게 성화와 불상들은 예술품이 아니라 심리적 지지대이다. 한 눈에 반해서 구매했던 미술작품이 옛 애인처럼 몇 년 후에는 매력을 잃고 창고에 처박히기도 하고, 어떤 미술품은 가족과 같아서 늘 지나치면서도 인식하지 못하다가 막상 없어지면 허전하다.


미술작품을 대하는 것은 사람을 만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누군가는 운명적인 상대와 불같은 사랑에 빠지지만, 또 다른 누군가는 데면데면하게 지내거나 거북해서 피하기도 한다. 남들은 목이 쉬도록 찬양해도 내게는 별 감흥이 없거나, 반대로 내게만 매혹적인 작품이 있다. 미술품 감상이 교양인의 필수조건이나 의무는 아니다. 그러나 어린 네로처럼 “이제 충분하다!”고 부르짖을 만큼 격렬한 체험이 아니더라도, 일상에서 작은 활력이 되고 힘들 때 친구나 가족처럼 기댈 수 있는 미술품이 곁에 있다면 우리 삶이 그나마 덜 고단할 것이다.


글 조은정(서양화87-91) 목포대 미술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