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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0호 2018년 3월] 기고 에세이

녹두거리에서: 21세기 한국에서 서울대생이 되려면

조수남 과학사학자·모교 강사

21세기 한국에서 서울대생이 되려면


조수남

대학원97-00
과학사학자·모교 강사


필자는 대학에서 학기 말 과제로 학부 학생들에게 꽤 수준 높은 연구 논문을 쓰게 한다. 학생들이 어려워할 것은 당연하다. 따라서 이메일을 이용하거나 혹은 직접 만나서 기말 리포트 주제를 놓고 상담을 해준다. 이때 대부분은 필자의 예상을 벗어나지 않는 주제를 가지고 온다. 10년 가까이 기말 리포트를 받아왔으므로 웬만하면 이전에 가르쳤던 학생의 리포트 주제와 겹치는 것이다. 그런데 학생 중에는 필자의 예상을 완전히 깨는 이들이 있다. 이 경우 자연스럽게 어떻게 이런 주제를 선택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자료는 어떤 것을 참고할 것인지 등을 물어본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독특하게 뛰어난 학생 중에 외국에서 오랫동안 공부하고 온 이들이 많다는 사실이다. 우선 이 학생들은 학부 학생들이 전혀 건드리지 않을 주제를 과감하게 선택한다. 대부분 학부 학생 수준에서 완성도 있는 논문을 쓰기 힘든 주제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겁 없이 뛰어든다. 물론 대부분은 학기 말이 되면 양해를 구한다. 주제가 어렵고, 시간이 부족하며, 자료가 부족해서 어느 정도 수준에서 리포트를 마무리하겠다고 말이다. 자연히 결과물의 완성도는 조금 떨어진다. 하지만 필자는 그런 학생들에게 아주 높은 점수를 준다. 한글 자료만 고집하는 서울대생이 많은 현실에서 이 학생들이 참고하는 해외 자료들은 대개 수준이 매우 높다. 자연히 그 정도의 리포트를 쓰는 데도 상당한 공부가 필요했을 것이다.

한 번은 그런 학생 중 한 명과 리포트 주제에 대해 상의하면서 꽤 오래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리포트 주제에 관해 이야기하다 자연스럽게 서울대 강의와 학생들 이야기로 넘어갔는데, 그 학생이 한 이야기가 잊혀지지 않는다. 그 학생이 한 강의를 들었는데, 수업을 제대로 듣지도 않은 상태에서 학기 초부터 학생들이 조를 짜서 과제 준비를 하는 게 이상했다고 한다. 그래서 조를 짜는 학생에게 물어보니 이렇게 하지 않으면 학기 말 안에 과제를 제대로 끝내기가 힘들 거라고 했다고 한다. 아마 그 학생은 한국에서 오랫동안 선행 학습에 익숙해 있던 학생이었을 것이다.


일러스트 소여정(디자인09-13) 동문



우리나라 교육계의 현실을 떠올리며 씁쓸한 표정을 떠올리고는 방학 때 무엇을 할 것인지를 물어봤다. 드림웍스 애니메이션 제작사의 그래픽 부서에 인턴 신청을 했는데, 인터뷰를 하는 과정에서 부작가팀으로 가게 되었다고 했다. 참으로 대견한 생각이 들었다. 이후 이 학생이 필자 수업에서 쓴 리포트가 서울대에서 실시하는 우수리포트대회에서 우수상을 받게 되어, 초청장을 받고 개학 후 시상식에 참여했다. 학생을 만나 축하하며 방학은 잘 보냈냐고 물어봤다. 그랬더니 인턴 생활은 만족스러웠고 드림웍스 측에서 제안해서 다음 방학에도 드림웍스로 갈 예정이라고 했다. 크게 칭찬하며 격려했다.


그런데 그와 함께 우리나라 교육에 대한 진한 아쉬움이 밀려왔다. 우리나라에서 공부해서 서울대에 가려면 거의 완벽한 모범생이 되어야 한다. 국어, 영어, 수학은 기본이고, 문과면 사회, 이과면 과학 분야에서 1등급 정도 받을 수 있도록 완벽하게 공부해야 한다. 그러다 가령 과학 분야에 흥미를 갖게 된다 해도 너무 과학 공부만 많이 해서는 안 된다. 내신 성적을 놓칠 수 있기 때문이다. 영어 공부도 마찬가지여서 내신 1등급을 얻을 수 있는 성적이면 더 이상 영어책이나 신문을 읽는다든지 하는 과욕을 부려서는 안 된다.
혹 이런 식으로 내신 관리를 하지 못했다면, 수능 시험 준비에 몰두해야 한다. 기출 문제를 풀고 또 풀어야 한다. 대학 학점 관리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아무리 흥미 있다 하더라도 한 과목에 과도하게 많은 시간을 들여선 안 될 것이다. 기말 리포트를 쓴다고 할 때는 A를 받을 수 있을 정도의 완성도 있는 리포트를 쓰면 될 것이다.

아쉽다! 시대가 변했는데도 고등학교 교육이 크게 많이 변하지 않은 것이. 안타깝다! 그런 학생들이 변화하는 사회에서 혹 경쟁력을 지니지 못할까 봐. 그리고 두렵다! 내 아이도 그런 교육에 익숙해질까 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