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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9호 2018년 2월] 기고 에세이

녹두거리에서: 87년의 기억

정홍수 문학평론가·강출판사 대표

87년의 기억

정홍수

국문82-88
문학평론가·강출판사 대표


1987년 나는 대학 마지막 학년이었다. 1, 2학기 모두 최대한 학점을 이수해야 겨우 졸업이 가능한 형편이었고, 야학과 공장생활로 이어졌던 어설픈 운동 언저리의 일에서도 복학을 전후해 발을 뺀 상황이었다. 만나는 사람도 거의 없었고, 모친이랑 단 둘이 살던 길음동 단칸방에서 학교까지 95번이나 25번 버스를 타고 오갔다. 어느 날은 불쑥 스카라극장 앞에서 내려 텅 빈 극장에서 조조 영화를 보기도 했다. 피터 위어 감독의 ‘위트니스’란 영화였는데 그때는 감독에 대해서는 전혀 몰랐고, 아마도 극장 간판에 그려져 있던 해리슨 포드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문명을 거부하고 자신들만의 종교 공동체를 꾸려 살아가는 아미시 교도의 마을이 아름다운 자연 풍광 속에 화면을 가득 채웠다. 형사 스릴러물의 외피는 뜻밖의 영화적 속살을 숨기고 있었고, 경찰 내부의 부패 세력에 쫓기는 형사 해리슨 포드와 아미시 마을의 여인 캘리 맥길리스의 위태로운 감정은 당시 나의 지리지 어디에도 존재한 적이 없던 밝고 평화로운 전원의 풍경과 함께 마음을 흔들었다. 영화가 끝난 뒤 극장 휴게실에서 혼자 모친이 아침에 싸준 도시락을 먹고 나니 도저히 학교로 갈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말하자면 그런 날들이었다.

연말에 장준환 감독이 만든 화제의 영화 ‘1987’을 보면서 계속 탄식과 함께 몸을 뒤척였던 것 같다. 일단 30년 전의 시간, 기억으로 돌아간다는 게 쉽지 않았다. 무엇보다 영화 속에서 재현되는 폭력 장면을 견디기 힘들었다. 정말 지랄 같은 시절이었다. 공권력에 의한 불법 연행, 고문이 아무렇지도 않게 일어나던 때였다. 1호선 남영역을 지나다 보면 나타나는 어두운 벽돌 건물. 치안본부 대공분실이라고 했다. 1987년 1월 14일 그곳에서 서울대 언어학과 학생회장 박종철 군이 숨졌다. 수배 중인 선배의 소재를 추궁하며 무자비한 폭행과 전기고문, 물고문이 자행되었다. 물이 가득 찬 욕조에 머리를 강제로 밀어넣는 과정에서 일어난 경부 질식이 최종 사인이었다. 경찰의 첫 발표는 그 유명한 “책상을 탁하고 치니 억하고 쓰러졌다”였다.


일러스트 소여정(디자인09-13) 동문


영화는 사건의 진실을 은폐하고 조작하려 한 세력과 진실을 밝혀 불의의 세상을 바꾸려는 이들의 대립 구도 아래에서 굉장한 박진감과 속도감을 보여준다. 사태의 진행을 이미 알고 있는데도 치안본부 박처장으로 대표되는 악의 세력이 진실의 힘 앞에서 한발씩 퇴각하는 순간에는 조였던 몸이 풀어지며 작은 안도의 한숨이 찾아온다. 김윤석이 연기한 박처장은 한국 현대사의 가장 깊은 모순이자 상처라 할 레드 콤플렉스, 극단적 반공주의의 화신이다. 그의 이북 사투리는 서북청년단 같은 역사적 기원을 환기하면서 ‘좌경세력’에 대한 생래적인 증오를 적절하게 표현한다. 김윤석은 이 모두를 눈빛과 손짓, 걸음 하나에 담아내면서 살아 있는 악으로 움직인다. 진실의 편에서는 뜻밖에도 검찰이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고, 의사, 기자, 학생, 재야 운동권, 종교계, 거리의 상인이 각자의 자리에서 세상의 변화를 향해 움직여가는 모습이 화면에 담긴다. 교도관들의 숨은 헌신도 인상적이다. 언제든 세상은 그렇게 바뀌어가는 것이리라. 6·10 항쟁을 거쳐 백만 시민이 집결한 이한열 노제의 광경이 노래 ‘그날이 오면’과 함께 엔딩 크레딧에 올라올 때 눈물을 참기 어려웠다. 사실 이미 여러 차례 눈가를 훔친 뒤였지만 말이다.

그런데 장르 영화에 버금가는 이 영화의 속도감과 카타르시스에 대해서는 조금 생각해볼 여지도 있는 것 같다. ‘87년 체제’라는 역사적 성과를 남겼지만 87년 6월 시민항쟁의 정치적 후과가 어떠했는지 우리는 안다. 박처장 캐릭터에 과도하게 모인 악의 에너지는 좀더 현실적으로 배분되는 가운데 역사를 성찰하는 시선으로 전화될 수도 있었다. 역사를 돌아보는 것은 좌절과 전망이 뒤섞인 혼돈과 무지의 자리로 돌아가는 일이기도 하다. ‘아는 자’의 시선을 선점하거나 하나의 악을 만드는 것은 질문을 단순화한다. 난 그해 명동과 시청의 열기 속에서 이상하게 힘들었고, 도망가고 싶었다. 그 힘겨움은 오랫동안 부끄러움으로 남아 나를 괴롭혔다. 그때 나는 무엇이 그렇게 두려웠던 것일까.



*정 동문은 모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후 1996년 '문학사상' 신인상에 평론 '김소진론'이 당선되며 비평활동을 시작했다. 정 동문의 비평은 문학 작품을 읽듯이 쉽고 감각적이면서도 냉철하고 날카로운 언어로 작품의 이면을 바라본다는 평을 받고 있다. 최근 첫번째 산문집 '마음을 건다'를 펴내고 그가 만난 세상의 좋은 작품들로부터 비롯된 글들을 묶어 선보였다. 그밖의 저서로 평론집 '소설의 고독' '흔들리는 사이 언뜻 보이는 푸른빛', '소진의 기억'(공편저) 이 있으며, 2016년 평론집 '흔들리는 사이 언뜻 보이는 푸른빛'으로 대산문학상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