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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5호 2017년 10월] 오피니언 느티나무광장

배철현과 함께 하는 행복한 지옥여행

정성희 동아일보 논설위원, 본지 논설위원 칼럼
느티나무 광장

배철현과 함께 하는 행복한 지옥여행


정성희 국사82-86
동아일보 논설위원·본지 논설위원


숨 가쁘게 내달린 인생에서 무언가 잘못되고 있다는 느낌을 14세기 단테는 ‘신곡’의 첫 구절에서 이렇게 표현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이란 여정의 한가운데서, 나는 내 자신이 어둔 숲 속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곳은 내 삶을 위한 최적의 길이 숨겨진 장소다.’ 맞아, 이건 내 얘기야. 단테가 신곡을 쓰기 시작한 때가 서른다섯일 때지만 100세 시대인 지금은 오십이 인생의 한가운데 아니겠는가.

인생의 한 가운데서 나는 인페르노를 공부하기로 했다. 인페르노 수업은 건명원이 서울대 동문을 대상으로 하는 일종의 번외과정이다. 그간의 종교관을 근본부터 흔들어놓는다 해서 서울대에서 ‘가장 위험한 강의’를 한다는 종교학과 배철현 교수가 강의를 맡았고 언론인을 주축으로 한 동문 30여명이 수강생이다. 아무렴, 비판을 업으로 하는 언론인에겐 지옥이 어울리지. 우리는 배 교수를 지옥의 안내자 베르길리우스로 삼아 33주간 지옥여행을 시작했다.

단테는 살아서는 아무도 가본 적이 없는 지옥 연옥 천국의 모습을 오로지 시인의 상상력을 동원해 1만4,000행의 시로 그려낸다. T.S 엘리엇은 신곡을 인류가 남긴 최고의 시로 평가한다. 그러나 신곡을 실제로 읽은 사람은 거의 없다. 중세 토스카나 언어로 써진 신곡은 한국어나 영어 번역으로는 그 맛이 살지 않을 뿐 아니라 그리스 로마 신화 및 성경에서 차용한 수많은 상징으로 가득 차 그 의미를 해독하지 않고는 읽었다고 해도 읽은 게 아니다.

언론인 주축 30여 동문 수강
33주간 인페르노 강의 들어
경계해야할 죄 ‘오만’ 깨우침
펜으로 고통준적 없나 반성

신곡의 원제가 ‘La Comedia Divina’라는 것부터 충격이다. 인간의 온갖 추악함을 목도하는 게 왜 희극인가. 배 교수는 그리스 비극의 전통에 빗대 불행에서 행복으로, 혼돈에서 질서로 향하는 여정이 기쁨이라는 의미로 저자가 ‘코미디’라고 했음을 설명해주었다. 시야가 걷히는 느낌. 인페르노 수업은 단순한 신곡 읽기가 아니다. 그리스 로마 역사, 서양문명의 기원, 성서와 종교, 예술과 문학의 세계를 종횡무진하다 보면 결국 인간이란 어떤 존재이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근원적인 물음에 맞닥뜨리게 된다.

지옥에선 버려야할 악행을, 연옥에서 죄업을 씻어내는 과정을, 천국에서 지향해야 할 삶의 방향을 보게 된다. 아홉 개의 둘레로 구성된 인페르노 하나하나를 지날 때마다 살아생전 지은 죄로 벌 받는 영혼을 만나게 된다. 애욕, 나태, 교만, 질투, 낭비와 인색이라는 죄로 고통 받는 사람들. 그들은 우리가 매일 만나는 인간군상이며 또한 나 자신이다. 단테가 지목한 죄는 시대상을 반영하고 있어서 지금 기준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도 많지만(예컨대 배불리 먹어도 죄다!) 그 핵심적 메시지와 통찰은 여전히 유효하다.

언론인으로서 특별히 경계해야 할 죄업은 오만이다. 그리스 전통에서 오만한 사람은 반드시 장님이 된다고 한다. 자신의 생각만 옳다고 생각한 적은 없는지, 펜을 잘못 휘둘러 애먼 사람에게 고통을 준적은 없는지 반성하게 된다. 지옥에 가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을까 만은 반백이 되어 다시 만난 동문과 함께 스승을 앞세우고 하는 지옥여행은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