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보기

Magazine

[453호 2015년 12월] 오피니언 느티나무광장

사실과 주장 사이

윤영호 동아일보 출판국 전략기획팀장


사실과 주장 사이

윤영호 (사회복지81-85) 동아일보 출판국 전략기획팀장


‘김일성 주체사상을 우리 아이들이 배우고 있습니다.’


얼마 전 한 정당이 중앙당사 건물에 내걸었던 현수막 문구다. 현재의 검인정 교과서가 ‘좌편향’돼 어린 학생들에게 김일성 주체사상을 찬양하는 식으로 가르친다는 것이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려면 한국사 교과서를 국정화할 수밖에 없지 않느냐는 ‘주장’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현수막 내용대로 우리 학생들이 김일성 주체사상을 무비판적으로 배우고 있다면 큰일이다. 김일성 주체사상은 김일성 1인 독재권력을 뒷받침하고 북한 주민을 동원하는 이론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런 교과서라면 당연히 폐기처분해야 하고 다시는 그런 교과서가 나타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러나 현재의 한국사 교과서를 조금이라도 읽어본 사람이라면 김일성 주체사상을 비판적으로 소개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한마디로 이 정당은 잘못된 ‘사실’을 근거로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 주장을 한 셈이었다. 여론의 반발이 심한 것은 자업자득이라고 할 만했다.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의 부당함을 재론하고 싶어 꺼낸 얘기가 아니다. ‘주장’과 ‘사실’을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는, 또는 구분하려고 하지 않는 우리 사회 일각의 행태를 한번쯤 짚어보고 싶어서다. 특히 잘못된 ‘사실’에 집착하는 권력의 해악은 온전히 국민이 감당할 몫이어서 더 엄격히 따져봐야 하지 않을까.


물론 ‘사실’과 ‘주장’의 경계가 명확하지 않을 때도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 익숙한 ‘사실’일수록 자세히 뜯어보면 ‘주장’에 불과할 때가 많다. 가령 ‘낙수효과’만 해도 그렇다. 대체로 대기업 및 부유층의 투자·소비 증가가 저소득층의 소득 증대로 이어져 국가적인 경기부양 효과로 나타난다는 ‘낙수효과’를 ‘사실’을 넘어 ‘진실’이라고 신봉하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낙수효과’의 효과가 검증되지 않았다는 ‘주장’ 역시 강력하다. 이들은 우리나라에서 경제력 집중이나 양극화가 더 심화한 것은 ‘낙수효과’를 노린 경제정책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은산분리’ 논란 역시 마찬가지다. 세계 일류 기업인 삼성전자와 같은 은행이 나오게 하려면 산업자본의 은행 지배를 허용해야 한다는 ‘주장’이 현재로선 더 강해 보인다. 현 정부가 ‘은산분리’ 규제 철폐를 강력히 밀어붙이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그러나 국내 대기업이 금융산업에 진출했다가 실패한 사례도 많다. 무엇보다 산업자본과 금융자본의 논리는 다르다. 산업자본은 경기 호황일 때는 돈을 빌려서라도 공장 설비를 증설해 최대한 물건을 많이 내다 팔아야 최대 수익을 얻을 수 있다. 과거 LG카드가 길거리 회원 모집을 통해 일정한 소득도 없는 사람에게 무턱대고 카드를 남발한 것은 전형적인 산업자본의 행태였다. 그 결과는 참담했다.


반면 금융자본은 경기 정점에서 오히려 몸을 낮춰야 한다. 이때 금융기관이 앞다퉈 주택담보대출을 실행했을 때의 부작용을 2005∼2007년의 서울 강남 아
파트값 폭등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은산분리’ 논리가 그냥 생긴 게 아니라는 얘기다.


누구나 ‘사실’과 ‘진실’의 무게 앞에서는 겸허해야 한다. 자기 ‘주장’을 ‘사실’인 양 강요하는 세력이 지배하는 사회는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자기 ‘주장’과 다르다는 이유로 10월 30일 모교에서 열린 전국역사학대회를 방해한 보수단체 회원들만 봐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