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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3호 2017년 8월] 인터뷰 동문을 찾아서

이낙연 국무총리 특별인터뷰 “산적한 난제들 용케 잘 푼 총리로 기억됐으면 좋겠다”

서울대 위상 낮추는 일은 잃는 것이 더 많아

이낙연 국무총리 특별인터뷰


“산적한 난제들 용케 잘 푼 총리로 기억됐으면 좋겠다”




이낙연(법학70-74) 국무총리의 동아일보 기자 시절 첫 출입처와 마지막 출입처가 국무총리실이다. 그곳에 지난 5월 그가 부임했다. 총리실 출입기자가 총리가 될 운명을 그는 살면서 짐작이나 했을까. 동아일보 기자로서 이 총리와 함께 일했던 필자는 문재인 대통령의 ‘이낙연 발탁’에 무릎을 쳤다. 잘해낼 거다. 이 총리는 “어려운 문제가 산처럼 많았지만 용케 잘 푼 총리로 기억됐으면 좋겠다”고 했다. 취임 첫 행선지가 경기 안성 가뭄현장이었는데 인터뷰한 7월 17일은 충북 청주 수해지역을 다녀온 직후였다. 인터뷰는 정부서울청사 총리 접견실에서 1시간 10분 진행됐다. 총리실과는 30분 하는 것으로 잡혀 있었다. 동창신문에 대한 배려였다. 인터뷰를 하는 동안 펜화가로 활동하고 있는 중앙일보 안충기(국사82-89) 기자는 총리 집무실과 접견실을 오가며 그림을 그렸다.

대담 : 정성희(국사82-86) 본지 논설위원(동아일보 논설위원)



내각에 맡겨진 일 책임있게 수행
매주 현안조정회의 최대한 활용
장차관들과 식사 자리 많이 갖겠다
KTX에서 시간도 생산적으로 활용
유능한 정부 만드는데 총력 다할것



왼쪽부터 정성희 본지 논설위원, 이낙연 총리, 안충기 본지 논설위원.



-취임하신 지 두 달여가 흘렀습니다. 돌이켜보면 어떻습니까.
“정신없이 지나갔어요. 부임 첫날 안성 가뭄현장 갔는데 오늘 충북 청주 수해현장을 다녀왔어요. 극과 극의 현장을 다녀온 셈이죠. 이제 본격적인 도전이 시작됐다고 봐야지요. 최저임금 인상, 신고리 원전 5, 6호기 공사 계속 여부 등 여러 난제들이 우리 앞에 닥칠 거라 봅니다. 지나온 50일도 벅찬 나날이었지만 다가올 날들에 비해서는 약과였다고 봅니다.”


-총리직을 어떤 마음으로 수락하셨는지 궁금합니다.
“두려운 마음이었죠. 첫 번째는 운명의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전남지사 임기 중 거부하기 어려운 국가의 큰 부름을 받았는데 이게 나에게 주어진 운명일까,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두 번째는 촛불혁명 이후 국민들의 다양하고 광범한 요구가 밀어닥칠 텐데 그 하나하나를 어떻게 들어줄 것인지 업무의 두려움이 있었지요. 그럼에도 운명이란 생각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대통령께서 나를 어떻게 보셨는지 모르지만 나름의 기대가 있으셨을 텐데 모른 척 한다는 것은 또 다른 무책임일 수 있겠다 생각 들어 수락했지요.”


-책임 총리에 대한 사회적 요구, 기대가 큽니다. 어떤 총리로 기억되고 싶으신지.
“문자 그대로 책임총리지요. 흔히 언론이 제기하는 것처럼 대통령과 각을 세우는 게 책임총리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내각에 맡겨진 일을 얼마나 책임 있게 수행하느냐, 그것이 책임총리의 본령입니다. 어려운 문제가 산처럼 많았지만 용케 잘 푼 총리로 기억됐으면 합니다.”


-평소 소통을 강조하셨는데 국무위원과 어떻게 소통할 계획이신지.
“대통령령으로 만들어진 국정현안점검조정회의가 있습니다. 약칭 현안조정회의라고 부르지요. 국무회의에서 다루기 어려운 안건 몇 개만 올려 치열하게 토론을 합니다. 매주 목요일 관계 장관 6~7명 정도가 참가합니다. 지난주에는 안건이 세 개 올라와 2시간 이상 토론했습니다. 평일 오전에 여러 장관들이 모여 2시간 이상 토론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닙니다. 국무회의에 안건이 15건 정도 올라와도 1시간이면 끝나거든요. 부처에 따라, 세력에 따라 이해가 상충하는 안건들이 많습니다. 그런 현안들을 조정하는, 굉장히 중요한 회의가 현안조정회의인데 이걸 제대로 꾸려보겠습니다. 또 하나는 가능할 때마다 소모임을 갖는 겁니다. 장관들을 밤에 소집하는 게 쉽지 않지요. 그래도 시간 되는 대로 하고 있어요. 예를 들어 서울에서 근무하는 신임 차관과 식사라든지 세종에 근무하는 신임 차관과 저녁이라든지 그룹을 지어서 어떨 때는 밥을 먹고 어떨 때는 막걸리를 마시고 있죠. 100% 새 정부 하에 장관들이 충원되면 본격 가동할 생각입니다.”


-소그룹으로 나눠서 일과 후에 수시로 만나겠다는 말씀이시죠.
“현안조정회의에서도 소화할 수 없는 이야기가 있을 수 있고, 때로는 청와대 흉도 보고요. 어떻게 조정할 것이며, 내각이 특별히 마음을 써서 보충할 게 무엇인지 이야기 나눠야죠. 공개된 회의에서 말하기 어려운 것도 밥 먹는 자리에서는 할 수 있지 않나요.”


-교수, NGO, 운동권 출신 등 정부 인사가 다양해 조정 역할이 커질 것 같습니다만.
“청와대 비서진은 열정이라는 자산이 있고 행정부(내각)에 있는 사람들은 경험과 지혜를 갖고 있습니다. 국가가 발전하려면 열정도 필요하고 정교함도 필요하지요. 총리가 양자를 조정하는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안충기 본지 논설위원(중앙일보 기자)이 이낙연 총리의 정부서울청사 집무실을 스케치 했다.



-세종과 서울 체류 시간이 어떻게 되세요.
“전임 총리들을 보니 대체로 서울 5일, 세종 2일 정도 됐던 것 같아요. 저는 4대 3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만만치 않죠. 대통령이 외국에 나가시면 제가 서울을 지켜야 하고 국회 회기 중에 서울을 벗어나기 힘들고요. 총리실 산하에 위원회가 많은데 참여하는 위원님들이 서울에 많이 계십니다. 서울 체류 시간은 중년 남자 허리 같아요. 내버려두면 늘게 돼 있어요. 일부러라도 세종 체류 시간을 늘리려고 노력합니다. KTX에서 보내는 시간이 낭비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생각을 정리하거나 새로운 게 떠오르는 곳입니다. 많은 공무원들이 서울과 세종을 왕복할 텐데 시간을 생산적으로 쓰는 지혜를 발휘했으면 합니다.”


-‘총리의 어젠다’라고 할까, 총리로서 어떤 부분에 집중할 계획이신지.
“유능한 정부를 만드는 일입니다. 총리 취임사에서 국민들이 나라다운 나라를 갈망하셨는데 그런 나라를 만들기 위해서는 정부다운 정부, 내각다운 내각이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를 위해 첫째 유능한 정부, 유능한 내각이 필요하고 둘째 소통의 내각, 셋째 통합의 내각이 중요하다고 강조했습니다. 소통과 통합은 기술적인, 즉 방식의 문제일 수 있습니다. 유능한 내각은 결과까지 포함한 내용이니까 셋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면 유능이죠. 부작용을 최소화하면서 문제를 풀고 좋은 결과를 내는 유능한 내각이 되기를 바랍니다. 만만치 않죠. 매일 총리실 간부와 국무위원과 씨름하는 게 유능한 정부를 만들기 위한 싸움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기자-국회의원-도지사-총리로

이낙연 총리의 변화를 두고 신동아 7월호에서는 ‘신공(초인적 솜씨)’이란 단어를 사용했다. 이 동문은 휴지기 없이 기자-국회의원-도지사-총리로 변신했다. 신공이란 표현이 과하지 않게 느껴진다. 그의 대학시절 꿈은 무엇이었을까?


“억울한 사람들 변론하는 변호사가 되고 싶었어요. 대학 2학년 때부터 하숙비 낼 돈도 없는데 사법시험에 몰두하기가 쉽지 않았어요. 영양실조에 걸릴 정도였죠. 대학 졸업앨범을 보면 뼈만 앙상해 시신처럼 느껴집니다. 제 키(177cm)에 50㎏ 아래로 떨어졌으니까요. 돈을 벌어야 해서 졸업하자마자 신탁은행에 취업을 했습니다. 그런데 동기들을 만나면 직장, 직업 설명하기가 힘들어요. 신탁은행이 드문 때죠. 그래서 누구나 알아듣는 직장이었던 동아일보의 기자로 들어갔죠(웃음). 그러다 어쩌다 보니 여기까지 왔네요.

저는 계획을 세우고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절묘한 설계가 있을 거라 생각하지만 그 반대입니다. 매순간 최선의 선택을 하려고 노력했을 뿐입니다. 기자 하다가 국회의원 될 때도 첫 제안을 거절하고 동경으로 갔죠(이 총리는 도쿄특파원을 지낸 일본통이기도 하다). 부장 시절에 다른 직업 가져도 괜찮겠다 싶어 정치에 발을 들여놓게 됐지요. 그러다 보니 지사가 됐고 여기까지 왔습니다. 상당 부분은 우연과 행운입니다. 신공이라 표현했던데 저는 그렇게 용의주도한 사람은 아닙니다.”


-준비되지 않은 사람에게는 기회도 오지 않죠.
“정 위원이 잘 아실 거예요. 제가 처세를 잘 하는 사람이 아니란 걸. 성질 고약하다는 말 많이 들었죠.”
필자는 이 총리가 국제부장 시절에 국제부 기자였던 인연이 있다. 이 총리는 유능한 사람 특유의 까칠함을 지녔고 일에서만큼은 만족을 모르는 완벽주의자였다. 그러나 정치인으로 변신하며 성품이 원만해졌다는 게 중평이다.


-일을 깔끔하게 처리하시죠. 부하 직원들은 고생하겠지만 국민에게는 좋은 거라 생각해요.
“부하 직원들은 징글징글 할 거예요. 그런 마음의 짐을 풀기 위해 날짜를 넘기지 않고 그날 식사나 막걸리 한 잔 하면서 풀려고 노력합니다. 계속 쌓이면 제 인생이 망가질 거 같아서요.”



서울대 위상 낮추는 일은 잃는 것이 더 많아


투박해도 심지 굳은 사람이 좋아
대학시절 형편 안 돼 사법시험 포기
매순간 최선의 선택하려고 노력
1학년때 DJ 장충동 연설에 감동
변화를 즐거운 마음으로 기다려라



-대학시절에는 정치에 대해 생각이 없었나요.
“안 했던 것은 아니고요. 머리에 수많은 생각들이 오갔죠. DJ(김대중 대통령) 연설 들으면서 흉내도 많이 냈죠. 선친이 야당 지방당원이었기 때문에 몸속 어딘가에는 정치인의 피가 돌아다니고 있었는지 몰라요.”


-당시 기억에 남는 일이라면.
“제 인생에 가장 길게 영향을 미친 사건이라면 역시 DJ와의 만남입니다. 대학 1학년 때 신민당 대선 후보를 선출할 때 DJ가 YS(김영삼 대통령)에게 역전승을 했지요. 1차 투표에서 졌다 2차에서 DJ가 이겼죠. 2학년 때 DJ의 장충동 연설은 정말 황홀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권력자의 선동이라고 느꼈음직한, 사람의 마음을 파고드는 강렬한 음성과 메시지가 있었거든요.

또 서양법제사를 가르치셨던 박병호 교수님의 마지막 강의가 기억에 남아요.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자네들이 사회에 나가면 지금 나보다 훨씬 훌륭해질 거네. 그런데 돈도 있고 뭘 먹고 싶다는 것까지 정했는데 어느 집 가야 할지 모를 때 그때는 나에게 연락을 하게.’ 노 은사님의 사랑을 느꼈습니다. 나도 언젠가 후배들에게 저 말을 해야겠다. 그것을 위해 여러 음식점을 다니고 있는지도 몰라요(웃음).”


-사람을 볼 때 중요하게 생각하는 덕목이 뭔가요.
“심지. 매끄럽지도 세련되지도 많이 알지 못해도 어떤 굳은 마음이 있는 사람이 존경스러워요. 후배의 행사 축사나 책 출간 할 때 서문에 심지가 굳은 사람이라는 찬사를 종종 합니다. 굉장히 좋아하는 사람이란 뜻 입니다. 예를 들어 김현미 국토교통부 장관이 심지가 있는 분이에요.”


-지방 국립대학 네트워크 이야기가 나오면서 서울대의 위상, 기능이 달라지고 위축되는 것 아니냐는 위기감이 큽니다.
“서울대에 대해 여러 문제 제기가 있고 서울대 스스로 많은 걸 반성하고 있다는 걸 압니다. 문제가 있다고 자꾸 허무는 것은 현명하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서울대학교는 대한민국의 훌륭한 자산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리고 평등이 요구되는 일반적 보통교육기관이 아니죠. 서울대 같은 특별한 고등교육기관에 다른 기관과 똑같은 것을 요구하면 다른 것을 잃게 됩니다. 이 시대가 서울대의 변화를 요구하고 다수의 국민이 불만스럽게 말씀하는 것을 서울대가 수용해서 바로 잡되, 서울대를 허물고 위상을 낮추는 일은 잃는 것이 더 많을 겁니다.”


-대학 동기 중에 친한 분이라면.
“동기가 160명입니다. 법학과 100명, 행정학과 60명. 오랜 기간 활동을 함께한 동기는 이주영 의원입니다. 국회의원도 같이 했고 당내 원내대표 선거에 비슷한 시기에 나가 둘 다 꼴찌를 했지요. 이후 이주영 군은 해수부장관이 됐고 저는 전남도지사가 됐지요. 대학 시절에 친했던 것은 아닌데 사회 나와서 오래 함께 활동하다 보니 친하게 지냅니다. 대학시절 친했던 동기는 정경택·이임성 변호사입니다. 정경택 동기는 한국 최고 로펌(김앤장)의 실력자고 이임성 동기는 늘 약자를 쳐다보는 변호사예요. 학생 시절에는 다 친했는데 어느 날 셋이 술 마시다 저 빼놓고 둘이 싸운 적이 있어요. 그만큼 둘이 생각이 달라요. 이 변호사는 대형 로펌의 문제에 대해 지적하는 친구고 정 변호사는 로펌 나름대로의 역할이 있다고 생각하는 친구고요. 싸운 이후로 셋이 모이지는 못했지요. 서로 다른 두 길을 가는 두 친구가 제겐 다 소중해요.”



집무실에서 바라본 바깥 풍경(안충기 본지 논설위원 스케치)



-쓰신 책 중에 남매들과 함께 쓴 ‘어머니의 추억’이라고 있으시죠. 총리님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분이 어머니겠죠.
“그 책을 쓴 것도 우연입니다. 무계획의 인생이라 아무 생각 없이 팔순을 모셨어요. 국회의원 할 때죠. 어머님 친정이 전라북도인데 우리 집이나 고향에서 팔순잔치 하면 요란할 것 같아서 어머님 친정에서 모셨어요. 떠들썩하게 먹고 마시다 손님들이 가시면 가족만 남잖아요. 남매들이 모여 한참동안 어머니에 대한 추억을 나눴어요. 헤어져 숙소에 돌아와 누웠는데 ‘오늘 웃고 울었던 이야기를 기록해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전원에게 문자를 보냈죠. 오늘 했던 이야기 포함해서 각자가 가진 어머님과 추억을 글로 쓰자. 1년의 시간을 주겠다. 책을 내자고 했죠.

어머님이 무학입니다. 아버님도 그렇고. 그런데 지혜로운 분이세요. 어머니란 직업이 지혜로운 직업이에요. 인생에서 가장 감동적인 변화, 엄청난 변화는, 소녀가 엄마가 되는 게 아닌가 싶어요. 남자는 그 경험을 못하기 때문에 죽을 때까지 철이 없는 거예요. 여성은 그 경험을 하는 순간 새로운 사람으로 태어납니다. 어머님의 지혜로움과 인내심은 늘 우리 모두에게 엄청난 이야깃거리가 되고 평생 자신을 뒤돌아보게 하는 교훈이 되었습니다. 어머님은 가난 때문에 평생을 전쟁하듯이 살아왔지만 유머가 있어요. 제가 어머니를 많이 닮았어요. 유머 감각, 매사를 긍정하는 태도, 무언가에 정신없이 빠져 버리는 것, 곱슬머리, 고혈압까지도요. 어머니가 올해 92세예요. 책에 없는 에피소드 하나 들려드릴까요? 제가 도지사가 되자 어머님이 공관 뒤 텃밭에 고추 상추 가지 오이 농사를 지으셨습니다. 그때 딸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내가 영광 집에 가서 농사를 제대로 해볼까 싶은데 나이가 좀 어중간하지?’ 90을 어중간하다고 표현하는 것이 그 분의 독특한 유머감각입니다.”


-마지막으로 서울대인에게 한 말씀 해주신다면.
“음, ‘당신도 예측할 수 없는 엄청난 변화, 엄청난 기회가 당신을 기다리고 있다. 기존의 시선으로 당신의 미래를 함부로 재단하지 마라.’ 제가 동아일보 국제부장 시절 쓴 칼럼 중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19세기 마지막 해인 1899년은 미국이 맹렬히 발전하던 시기인데 대망의 20세기를 얼마나 기대했겠어요. 수많은 언론이 20세기 전망 기획을 내놓은 가운데 레이디스 저널이라는 여성 잡지가 10가지 변화를 예측합니다. 정확하게 맞춘 것은 비행기가 나온다는 것, 형편없는 전망은 바퀴벌레가 사라질 것이라는 예측입니다. 그 전망이 보기 좋게 빗나갔죠. 요컨대 ‘전망은 맞을 수도 있지만 빗나갈 수 있다. 더욱이 시대가 발전할수록 빗나갈 가능성이 더 높아진다. 아버지건 선배건 먼저 간 사람들 또는 당신 친구들이 함부로 말하는 전망에 속지 마라. 아무도 예측하지 못하는 기회나 변화가 당신을 기다리고 있다. 그 변화를 즐거운 마음으로 기다려라. 그리고 대비하라.’

저는 DJ의 마지막 말씀인 ‘인생은 아름답다. 역사는 발전한다’는 걸 믿습니다. 아까 대학시절 꿈을 물어보셨는데 물론 법조인이 되고 싶어 법과대학을 갔지요. 하지만 아버지가 하숙비를 못 주셔서 사법시험을 포기하고 기자가 됐고 기자를 하다 보니 DJ를 만나 국회의원이 됐고 지사 총리가 됐잖아요. 이 변화를 압축해서 말하면 아버지가 하숙비를 못 줘서 국무총리가 됐다고 할 수 있죠. 결국 아버지의 가난이 얼마나 많은 축복을 준 겁니까. 많은 사람들에게 그 이야기를 해요. 국무총리가 된 게 대단한 게 아니라 이 변화 자체가 경이로운 거라고.”


정리·사진=김남주 기자




이낙연 총리는


1951년 음력 12월 15일 전남 영광군 법성면에서 태어났다. 삼덕초등학교(1964년), 광주 북중학교(1967년), 광주제일고(1970년)를 졸업했다. 서울 이태원 미8군 21수송중대에서 군복무를 했다.
1974년 모교 법대를 나와 잠시 신탁은행에서 일하다 동아일보에 입사해 정치부 기자, 도쿄특파원, 논설위원, 국제부장을 지냈다.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으로 정계 입문 후 19대까지 4선 국회의원을 지냈다. 민주당 대변인, 원내대표, 사무총장 등을 역임했다. 제37대 전라남도 도지사 재임 중 국무총리에 발탁됐다.
10차례 이상 국정감사 NGO모니터단 국정감사 우수의원에 선정됐고, 두 차례 매니페스토 약속대상, 국제평화언론대상 의정부문 최우수상 등을 받았다. 전남지사 시절 ‘100원 농어촌 택시’ 복지시책을 내놔 호평을 받았다.


주요 저서로 ‘80년대 정치현장(동아일보사 출판부)’, ‘세상이야기(강천)’, ‘이낙연의 낮은 목소리(도인)’, ‘어머니의 추억(아린 미디어)’ 등이 있다. 장남인 이낙연 총리와 7남매가 쓴 어머니에 대한 추억 모음집, ‘어머니의 추억’은 월간 ‘샘터’ 어머니 특집을 읽는 것처럼 정겹다. 이 동문과 그가 자라온 가정환경을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텍스트다.


굵고 낮은 목소리 때문에 어렸을 때부터 생영감이란 별명이 붙었다. 소통을 중요시해 총리 임명 되자마자 수십 명의 손님을 언제든 맞을 수 있게 가장 먼저 공관 주방의 밥솥부터 대형으로 바꿨다. 유머도 수준급이다. 최근 종로구 통인시장에서 식사 중인 한 시민에게 “다이어트를 우리말로 어떻게 번역하는 줄 아세요”라고 물은 뒤 “내일부터”라고 자답해 웃음을 자아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