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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4호 2017년 9월] 기고 에세이

녹두거리에서: 옥수수와 프러포즈

권귀헌 수필가·글쓰기 강사


옥수수와 프러포즈



권귀헌(대학원07-09) 수필가·글쓰기 강사



툭툭. 턱에서 미끄러진 땀이 바닥을 때렸다. 입고 있던 옷은 이미 질펀하게 땀을 먹었다. 그야말로 칠흑이었다. 까마득한 어둠 속에서 나는 온 신경을 귀에 집중했다. 하지만 바깥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 수 없었다. 2007년 9월, 결혼을 이틀 앞둔 날이었다.


미뤄왔던 과제를 해결해야 했다. 미뤘다기보다는 사실 외면하고 있었다. 프러포즈. 아내는 그걸 받고 싶어했다. 하지만 나는 프러포즈를 군더더기라 치부했다. 아내와 나는 초등학교 동창이라 오래 전부터 아는 사이였고, 고3때는 수능을 친 뒤 잠깐이지만 사귀기도 했다. 다시 만났을 때는 둘 모두 결혼을 염두에 뒀으며 1년 뒤에는 상견례가 이뤄지고 날도 받았다. 바람이 불면 이파리가 흔들리고 비가 오면 강물이 불어나듯 결혼으로 향하는 여정은 군더더기 없이 자연스러웠다. 이런 상황에서 웬 프러포즈!


결혼식이 코앞으로 다가왔는데도 자연주의를 표방하는 내게서 아무런 기미를 찾지 못한 아내는 나지막하게 경고했다. 프러포즈 안 하면 결혼식 날 내 얼굴 못 볼 알아! 영화 속 주인공으로 만들어주겠다는 유혹인가, 신부가 없는 결혼식이라니. 이성을 되찾은 나는 차분하게 머리를 굴렸다.


계획은 이랬다. 장소는 미리 마련한 신혼집. 퇴근 후 도착한 그녀는 현관을 열며 한 통의 편지를 발견한다. 편지에는 둘 만의 이야기가 아름다운 문장으로 새겨져있다. ‘OOO으로 가시오.’라는 마지막 문장을 읽은 그녀는 ‘OOO’으로 이동한다. 그곳에서 읽게 될 또 다른 편지가 비슷한 방식으로 그녀를 이끈다. 감정은 점점 복받쳐 오르고 마지막 장소에선 반지와 꽃다발을 든 왕자가 나타난다. 그녀는 눈물을 펑펑 흘리고, 왕자는 무릎을 꿇고 그녀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우며 청혼한다. 나와 결혼해줄래요?


오후 5시, 모든 준비는 끝났다. 나는 비밀의 장소에 들어가 숨죽인 채 그녀를 기다렸다. 삑삑삑삑, 삐리릭, 철컥. 현관문이 열렸다. 부스럭 부스럭. 풋. 편지를 읽은 그녀의 코웃음이 경쾌하게 들려왔다. 푸우~욱. 소파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래, 현관 다음은 소파였지! 자, 다음은 식탁. 그래, 좋았어. 고이 접힌 편지지가 날개를 폈다. 계획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몇 분 뒤면 우리는 만난다. 숭고한 의식은 아름답게 기억될 터였다.


그런데 몇 분이 지나도 아무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거기가 끝이었다. 편지를 잘 못 썼나. 도대체 왜 멈췄지. 신경을 곤두세워보니 비닐봉지를 만지는 소리가 아주 작게 들렸다. 그 다음, 뭔가를 차지게 씹는 소리가 났다. 툭툭. 땀은 쉬지 않고 바닥을 때렸다.

아니, 이 상황에서 뭘 먹는 거야! 숨이 막혔다. 땀이 주루룩 흘렀다.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다. 장롱 문을 열고 몸을 날렸다. 실내 공기가 이렇게 쾌적하다니, 짧은 감탄을 속으로 삼키며 바로 안방 문을 열어 젖혔다.


옥수수. 두 눈을 가운데로 모은 채 옥수수를 물고 있는 아내가 말했다. 식탁에 앉아 지루한 편지를 읽다가 문득 눈에 들어온 옥수수를 먹고 있노라고. ‘책상’으로 가라고 되어 있었는데 ‘식탁’과 헷갈려서 여기가 끝인 줄 착각했다고.



일러스트 소여정(디자인09-13) 동문



옥수수를 깔끔하게 다 털어 넣은 아내는 상황을 이렇게 마무리했다. 자기야, 미안한데 내가 편지나 글 이런 거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알잖아, 학교 다닐 때도 독후감 같은 거 엄청 싫어했던 거. 프러포즈하느라 고생했어. 결혼 허락할게!


루시 모드 몽고메리가 ‘빨강머리 앤’의 입을 통해 이런 말을 했다. 인생은 생각대로 되지 않아 아름답다. 그렇다. 내 프러포즈는 철저하고 완벽했음에도 불구하고 겨우 옥수수 따위에게 무릎을 꿇었다. 하지만 우린 잘 살고 있다. 아내는 문자 알레르기가 있는 사람인데 글로 빌어먹는 사람을 남편으로 만났다! 하지만 우린 행복하다. 생각대로 되지 않아도 슬퍼 말기를. 계획과 달라도 얼마든지 아름다운 과정을 만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글도 처음에는 ‘의사소통의 중요성’을 염두에 두고 쓰기 시작했다. 하지만 어떤가! 이게 우리의 삶이 아닐까.




*권 동문은 육군사관학교 졸업 후 모교에서 교육학 석사를 거쳐 국방어학원에서 한국어학과장, 학처장을 역임하며 외국 장교들에게 우리나라 말과 문화를 강의했다. ‘이코노미스트’에 칼럼을 게재하고 현재는 기업, 학교와 대중을 대상으로 글쓰기 강좌를 진행 중이다. ‘저서로 질문하는 힘’, ‘삶에 행복을 주는 시기적절한 질문’, ‘포기하는 힘’ 등이 있으며 전역 후 세 아이의 육아와 살림을 맡은 경험을 담은 에세이 ‘아이 셋 키우는 남자’를 펴내 화제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