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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7호 2017년 2월] 기고 에세이

녹두거리에서: 압구정 키드의 자괴감

이재익 SBS PD·소설가

압구정 키드의 자괴감


이재익(영문94-01) SBS PD·소설가



녹두거리 한복판에서 나는 깨달았다. 팔자 좋은 나는 다시 태어나지 않는 한 ‘거대한 삶의 균열에서 건져 올린 언어들’은 구사하지 못하겠구나. 깨끗하게 포기하자.

배부른 소리로 들릴지도 모를 이야기다. 대학을 다닐 당시 내 고민은 도무지 심각할 게 없다는 것이었다. 2학년 때 무척 이른 등단을 한 후 그 고민은 더욱 깊어졌다. 글쓰기를 좋아하고 재미있는 이야기라면 환장했던 터라 어릴 때부터 소설 습작을 했고 등단까지 덜컥 해버렸는데, 뭘 써야할 지 몰랐다. 밥 한 번 굶어본 적 없고, 엄마 차를 타고 입시학원을 돌다가 서울대에 입학한 압구정 키드에게 무슨 대단한 고민이나 사명감이 있었겠는가?

이른바 X세대라고 불리던 94학번이었던 나는 사회와 역사에 대한 고민도 별로 없었고 당시의 세상이 너무나도 즐겁게 잘 돌아간다고 생각했다. 먼저 등단한 선배들이 입버릇처럼 말하는 ‘처절한 문제의식’ 같은 표현은 남의 나라 얘기 같았다. 그런 내가 왠지 부끄러워서 선배나 동기들과의 진지한 술자리는 되도록 피하려고 했다. 정 참석해야 할 자리에서는 괜히 대단한 고민이라도 있는 척 감정과 의식과잉의 상태를 연기했다.



일러스트 소여정(디자인09-13) 동문



그러던 어느 날, 한 출판사의 연말 술자리에 따라갔다. 출판사로부터 정식으로 초대받긴 했지만 나 같은 어린애가 낄 자리가 아니었다. 막상 가보니 내 또래는커녕 20대는 한 명도 없었다.

“신기하네요.”

낯선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어린 여자애가 나를 보고 있었다. 히피처럼 길게 기른 머리를 퍼머하고 짙은 화장을 했으나 그래봤자 스물 한 두 살밖에 안 되어 보였다. 또래는 또래 나이를 알아보니까.
어디서 이런 애가 튀어나왔지?

알고 보니 그녀는 나처럼 어린 나이에 등단한 시인이었다. 나처럼 같이 말 섞을 사람이 없이 난감하던 차에 나를 발견하고 말을 붙인 것이었다. 우리는 서로 인사하고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아무도 우리를 챙겨주지 않고 아무도 우리를 방해하지 않았고 아무도 우릴 말리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는 만취해버렸다. 문단의 대선배님들 틈에서. 두 어린 년놈들의 깔깔거리는 소리에 어르신들이 불편해하기 시작했고 결국 출판사 직원분이 우리에게 다가와서 많이 취하신 것 같으니 귀가하시는 게 어떻겠냐고 말씀하셨다.

반강제적으로 쫓겨난 우리는 녹두거리로 향했다. 거리에서 술을 마시고 노상방뇨를 했다. 신나게 떠들고 노래하고 문학을 모욕했다. 그때 그녀가 시를 한 수 읊어주었다. 실비아 플라스(Sylvia Plath)의 ‘아빠(Daddy)’였다.

뭐지? 이 한없이 우울하고 절망적인 기운은? 다음날 술이 덜 깬 채 녹두거리에 있는 서점에 가서 실비아 플라스의 시집을 샀다. 책 뒤에 붙어있는 그녀의 일생은, 절망적인 삶을 산 수많은 작가들 중 단연 으뜸이었다. 그녀의 시어가 과격하다 한들, 실제 삶에 비하면 동요 수준이었다. 녹두거리 한복판에서 나는 깨달았다. 팔자 좋은 나는 다시 태어나지 않는 한 ‘거대한 삶의 균열에서 건져 올린 언어들’은 구사하지 못하겠구나. 좋아. 그런 것들은 깨끗하게 포기하자.

그 뒤로, 있는 그대로의 나를 인정하기 시작했다. 학교 친구들과의 자리도 피하지 않고 괜히 심각한 척 의식 있는 척 연기하지도 않았다. 용기 내어 내가 진짜 쓰고 싶은, 그저 재미있는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실비아 플라스를 소개해 준, 그녀를 닮고 싶다던 여류시인은 어떻게 됐냐고? 그녀는 실비아 플라스만큼 과격한 시어로 출렁거리는 시들을 발표했다. 시집도 내고 권위 있는 문학상도 받았다. 그녀의 시에는 짐승의 내장이 으깨지고 알몸의 미친 남녀들이 뛰어다니고 시정잡배도 민망해 할 욕설이 난무한다. 오오, 여기까지는 실비아 플라스와 비슷했는데….

최근 그녀의 소식을 들었다. 마흔 두 살의 그녀는 두 아이의 엄마로 알콩달콩 살고 있더라. 글과 삶이 같아지기란 참 어려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