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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4호 2016년 11월] 뉴스 본회소식

민족의 역사와 지도집단의 사명

서정화 회장 특별기고



민족의 역사와 지도집단의 사명


서정화 회장


작금의 대한민국이 여러 난제에 봉착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대한민국 건국 이후 국가의 지도집단이 혼신의 노력을 기울여 구축해낸 발전계획과 성장동력은 명백히 그 효력을 잃고 있다. 시급히 새로운 전략을 수립하여 실행에 옮겨야 할 때다.


그러나 대선을 1년 남짓 남겨두고 있는 지금, 국민여론이 심각히 분열된 상황에서 소모적인 정쟁은 넘쳐나지만 생산적인 토론은 요원하다.


국가 전체의 활력이 약화되고 민족의 안녕이 불확실해졌던 위기는 이번만이 아니었다. 우리 민족은 수천 년 동안 여러 번 그 난관을 직면해야 했다. 이에 성공적으로 대처했던 집단은 장구한 역사 속에서 그 진통과 가치를 후세에 이어갈 수 있었지만 그렇지 못한 집단은 쇠망하여 반면교사(反面敎師)의 일원이 될 뿐이었다. 그 역사의 흐름 속에서 오늘 우리가 되짚어봐야 할 교훈을 찾는 것 또한 대한민국의 향방을 성찰하기 위한 하나의 시도가 될 듯하다.


고려는 나말(羅末)의 혼란을 딛고 개창된 왕조다. 고구려와 백제를 정복하고 삼국통일을 이룩한 신라는 통일 이후 300년이 지난 시점에서 다시 후백제, 후고구려, 신라 등 후삼국으로 분열됐다. 이 과정에서 무수히 많은 군사집단들이 백가쟁명하며 일상적인 내전을 벌였고, 발해와 북방민족들의 압박에 대응해야 할 때임에도 국가의 역량은 분산되다 못해 소멸되었다. 갈등으로 국력은 누수되었으며 국민들의 삶은 극도로 불안해졌다. 고려를 건국한 지도세력은 다른 모든 시대의 지도집단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국민들에게 이러한 혼란에 대한 답을 내놓아야만 했다.


무수히 많은 군사집단들이 난립했던 한반도를 통일하고 새로운 왕조를 건국한 주체는 송악(松嶽)의 호족이었던 왕건 세력과 신라계 귀족들의 연합세력이었다. 이들은 불안했던 정국을 안정시키기 위해 발해를 포함한 각지의 군사집단들을 최대한 포섭하기 위해 노력했다. 왕건은 유력 호족들과 적극적으로 통혼하면서 국내의 갈등을 봉합했다. 사상적으로 불교, 유교, 신라 도교 토속신앙 등의 다원적 공존을 인정하는 정책을 추진하여 신라 말 고려 초 극심하게 분열되었던 국론을 통합했다. 그 결과 후삼국뿐만 아니라 발해의 유민까지 포괄하는 통일국가를 건설할 수 있었다. 이처럼 다원주의에 기반한 유연한 포용은 고려 건국 세력의 핵심적인 정책이었다.


이들의 다원주의와 유연성은 국내 정치에만 적용되는 원칙이 아니었다. 고려를 건국한 지도세력들은 동북아시아 외에 인도와 페르시아를 포함한 세계의 다양한 국가들과 적극적으로 교류하면서 국부(國富)를 축적하고 문화를 융성시켰다. 개경 인근에 있었던 항구도시인 벽란도(碧瀾渡)는 아시아의 대표적인 경제·문화 허브(HUB)였으며 이곳에서는 세계 최고 수준의 물품들과 함께 세계 각지에서 온 사람들이 상시적으로 거주하면서 교류해나갔다. 고려의 지도층은 이렇게 국가를 적극적으로 개방하여 국제시장에 편입시키는 한편, 세계와 경쟁할 수 있는 고려만의 상품(청자, 불화, 화문석 등)을 개발하여 수익모델을 창출했다. 그 결과 고려는 중국을 포함해 세계 여러 나라에서도 뒤지지 않는 문화와 경제를 이룩해냈다.


고려의 건국이 한민족 역사상 지도집단의 역량을 보여준 하나의 사례라면 조선의 건국은 비슷한 상황에서 정반대의 대안을 보여준 다른 경우다. 포용정책을 끝까지 견지하지 못하고 계층갈등을 자초한 결과 내부에서부터 붕괴된 고려 정부는 몽고의 침략을 막아내지 못하고 그 속국이 되고 말았다. 100년 가까이 원의 속국으로서 연명한 결과 고려 정부의 통치력은 와해되었으며 국내의 부패한 특권세력을 통제하지 못한 결과 부정부패에 의한 심각한 국력의 누수가 발생하고 국민들의 삶의 질은 극도로 저하되었다. 또한 원이 명에 의해 축출되면서 기존의 국제질서가 붕괴되고 북방기마민족과 남방의 왜구가 동시에 준동하던 위기 상황에 대처할 만한 역량을 발휘하지도 못했다. 이처럼 고려 말의 상황은 신라 말의 상황과 전반적으로 유사했다.


그러나 고려 말의 혼란을 종식시키고 조선을 건국한 주도세력들인 사대부들은 고려 건국세력과 다른 노선을 채택했다. 고려 태조 왕건이 적극적인 포섭 정책을 통해 각지의 호족들을 회유했다면 사대부들은 친원파 기득권층들을 철저히 배제하면서 권력을 독점했다. 성리학을 국가의 정체성으로 확립하고 모든 통치정책을 이에 근거하여 기획하고 추진함으로써 국론의 통일을 도모했다. 이를 통해 조선은 고려의 한계를 극복하고 국가로서의 체계성과 통합력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이러한 체계성은 권력구조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었다. 조선은 적극적인 대외무역을 통해 경제성장을 도모했다. 고려의 전략이 결과적으로 빈부의 격차를 야기하고 지도집단을 국민 다수로부터 분리시킨다는 문제의식 하에 철저하게 내수 중심적인 경제정책을 추진했다. 이를 위해서 농업경제의 주요 생산수단인 토지를 농민들에게 재분배하는 한편 지도집단인 왕족과 사대부들이 향유할 수 있는 부(富)의 한계를 엄격히 규제함으로써 사회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시켰다. 그 결과 조선은 국제사회의 변화에 기민하게 대응할 수 있는 유연성을 상실했으나 근세에 유례 없는 500년 동안 왕조를 안정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러한 안정은 세계와 조선의 격차가 과도하게 벌어져버린 구한말 때까지 지속되었다.


조선과 고려의 건국을 주도한 지도세력은 각지의 배경과 저항 속에서 각각 다른 대안을 제시했지만 한 국가의 지도집단이 갖춰야 할 여러 요건들을 보여준다. 그중에 특히 주목되는 것은 그 정책의 시야와 기획의 종합성이다. 고려와 조선의 지도집단이 제시했던 권력구조와 사상체계는 고려 경제 및 사회의 발전 방향과 완벽히 부합되는 것이었다. 개별 사안에 대중적 고식책을 제시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국가 전체를 조망하는 장대한 비전을 제시하고 이를 국민들에게 납득시키며 추진할 수 있는 역량을 보여줬기에 그들은 수백 년을 이어가는 새로운 국가체제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 전방위적인 어려움 속에서 여러 대안들이 상반되며 서로 충돌하는 듯한 대한민국 호가 더욱 필요로 하는 모습이라고 하겠다.


산업화와 민주화 이후 대한민국이 추구해온 발전 전략은 선진화와 세계화였다. 한국 정부는 무역을 통해 이룬 경제성장을 극대화하기 위해 규제를 완화하여 시장과 사회를 개방하고 세계적 기준에 한국 사회를 맞춰서 지식과 인재의 교류를 더욱 활발하게 만들기 위해 매진해왔다. 그러한 노력에 힘입어 대한민국은 세계 10위권 경제대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이는 대한민국 건국 이후 민족을 주도해온 지도집단의 성과이며 국민 모두가 노력한 결실이었다.


그러나 2016년 현재 대한민국을 둘러싼 정세는 급속하게 변화하고 있다. 3대 세습을 완료한 북한은 그 비정상성이 극에 달하여 대한민국과 국제사회의 평화를 심각하게 위협하고 있다. 반면 이러한 위기상황을 통제할 수 있는 국제사회의 간섭력은 약화되고 있다. 이 난국을 타개하여 민족중흥의 기회로 삼기 위해서는 대한민국 민주공화체제의 정통성을 기반으로 하여 민족 전체를 아우를 수 있는 강고한 체계적 사상적 합일의 태세를 확립해야 한다.


한편 세계 규모의 경제 불황이 지속되면서 그동안 서구 열강들이 주도해왔던 국제 질서가 급속하게 변화하고 있다. 자유로운 교류와 무역을 확산시킬 것을 주장해왔던 서구 강대국들은 이제 보호무역을 강화시키면서 국가 단위의 경제체제를 강화시키고 있다. 반면 대한민국이 그동안 의존해왔던 성장동력은 그 경쟁력을 소모하고 뚜렷한 하향세를 보이고 있다. 대한민국이 여전히 교류와 무역을 통해서 성장해야 하는 국가인 것은 분명하지만 산업과 무역의 구조를 어떻게 재편해야 하며 자원을 어디에 어떤 방식으로 집중해야 할지 세밀한 재검토가 필요한 시점이다. 요컨대 자원성을 기반으로 한 세계화와 합일성을 전제로 한 국가통합을 정교하게 결합시킨 새로운 국가전략이 필요한 것이다. 한 방향에 집중함으로써 국가재건을 이뤄냈던 선조들과는 달리 오늘날 우리는 전방위적인 더욱 어려운 목표 앞에 서 있는 것이다.


한민족의 역사 속에서 국가적 위기에 대응하지 못하고 환난 속에서 스러져 간 사례는 무수하다. 민족의 정통성이 오늘날 대한민국으로 이어져 이렇게 발전해온 것은 되짚어 보면 많은 지도집단들이 탁월한 판단과 헌신적인 노력을 보여 왔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오늘날 지도집단이 당면한 위기를 슬기롭게 극복해내지 못할 경우 한민족의 역사는 정녕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 또한 주어지지 않는 것임을 새삼 깨우쳐야 할 시점이 이제 도래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