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2호 2016년 9월] 뉴스 본회소식
오리 이원익의 부동심과 청렴행정
서정화 회장 특별기고
오리 이원익의 부동심과 청렴행정
특별기고 서정화 회장
2016년 9월 정부는 기존의 제도적 관료부패를 개선할 수 있는 ‘김영란법’ 시행을 앞두고 있으나 관행적 부패문화가 어느 정도 바뀔지는 미지수다. 니체는 인류가 오늘날까지 치유하지 못한 가장 큰 병을 양심(本性)의 가책과 죄의식으로 규정하였으며, 그 치유책으로 인(仁)의 실천을 제시하였다. 오늘날 공무원들의 공직 윤리 저해요인은 행정인들의 만족할 줄 모르는 탐욕(貪慾), 모방소비, 공직사유관과 의리의식 등에 기인하기 때문에 이들 국가 관리주체들의 정신건강 보호와 관료부패의 예방적 효과진작 방안이 필요하다.
특히 고위 공직자들의 경우 자신에 알맞은 자기 수양 결여에서 천민성(賤民性)이 노정되었다. 천민성은 사회적 병이다. 생각과 행동이 병들어 천해지는 관료병이다. 관료병이란 개인적 탐욕에 따른 정신적 측면의 질병으로서, 공직내 개인의 직무, 직책과 관련된 정신적 물욕범죄며, 그 결과가 부패행위로 나타나는 공무원 범죄의 모태가 된다.
서양에 “고귀한 신분에 따른 고귀한 의무이행”이라는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가 있다면 조선시대에는 선비정신으로서의 예의염치(禮義廉恥) 사상이 있었다. 조선의 선비들은 대학(大學)의 명덕을 밝히는 것을 목표삼아 수기치인법을 훈련하였다. 명덕(明德)이란 심상(心狀)으로 잡된 생각이 없어 정신이 신령하여 어둡지 않은 상태(虛靈不昧)로서, 이러한 고요한 심상에서 내외부의 변동에 흔들림이 없는 부동심(不動心)이 태동한다. 이들 사익만 추구하고 특권만 누리려는 탐욕적 고위층에 대한 경고장치로서의 근대적 관료청렴 진작 방안 마련이 절실해짐에 따라 이하에서는 지금부터 약 500여년 전(선조∼인조) 여섯 번의 영의정을 지낸 청백리 오리(梧里) 이원익(李元翼, 1547∼1634) 관련 역사적인 그의 청렴행정 사례를 중심으로 그의 수기치인관을 살펴 보고, 오늘날 청렴행정을 위한 교훈점과 활용방안을 찾아 보고자 한다.
먼저, 이원익의 정책 성공을 낳은 것은 수기안민(修己安民)의 힘이었다. 이원익의 사상과 실천은 기본적으로 수기치인(修己治人)이고 치인은 곧 안민(安民)이라는 유학의 기본 이념으로 집약된다. 안민이 되면 경세제민(經世濟民)이 되는 것이다. 이원익은 고매한 인품과 덕망 덕분에 백성이 그를 믿고 따라 지방관으로서 치적을 이루었고 재상(宰相)으로서 국난 극복에 이바지하였다.
둘째, 오리의 섭양법 측면이다. 오리는 섭양법으로 희로애락을 다스려야 함을 강조했다. 공은 정기(精氣)를 잘 보호하고 약을 먹었으며 주량이 셌으나 취하게 마시지는 않아 장수했으니 이는 모두 위와 같은 수양과 섭양(攝養)의 방법이 있었기 때문이다.
셋째, 오리의 부동심이다. 공은 일에 다다르면 마치 산악처럼 우뚝하여 움직이지 않았다. 오리의 개인적 심신 수양관 측면에서의 수양의 핵심은 부동심과 완평(完平)이다. 완평심(完平心)은 모자람이 없고, 치우침이 없는 마음이다. 그는 오랜 수양을 통해 마음을 잘 닦아 거울처럼 모자라거나 이지러진 부분이 없도록 다듬었다. 그는 만년에 허목(許穆)에게 이렇게 말했다. “사람의 마음은 마치 물건을 비추는 거울과 같다네. 기미를 잘 살펴 취사를 잘 결정할 수 있다면 마음이 밝은 것이네. 용맹은 밝은 데서 나오니, 밝으면 의혹이 없고, 의혹이 없으면 흔들리지 않는다네.” 허목은 “이것이 공의 평생의 힘을 얻은 방책이다”라고 평했다. 이런 마음의 완전경지가 부동심이다. 오리의 ‘16자 훈계’에서 분명하게 제시된다. 완전한 마음이 목표다. 공명정대해야 바른 결정을 할 수 있다.
넷째, 재물관 측면이다. 양난(임진, 정유년) 이후 공신으로 책봉(호성 공신 등)되자, 선조가 토지를 마음대로 점하라고 하자, 그는 바늘을 가지고 오라고 하여 “바늘구멍(돗자리 짜는 바늘)으로 보이는 곳”만 취했다고 전해진다. 재물욕심이 없던 그는 스스로 짚신을 꼬아서 신고 지붕으로 쓸 만큼 청렴하였다.
끝으로, 그는 말년에도 공직자의 도를 끝까지 지켰다. 인조가 궤장, 안석, 지팡이 등을 하사하자 후임관료들이 기념 연회를 열었으나 장소가 없어 집의 빈터에 휘장을 쳐서 연회하였다. 그는 온 생애를 직(直)과 충(忠)으로 살았다. 공의 전덕(全德)은 한가지로 이름할 수 없으나 그 중 가장 큰 것은 도를 깨끗이 지킨 것이다. 순수하게 정도를 지켰으니 백세토록 의혹이 없는 것이다. 공은 세 조정에서 시종 한 마음이었고, 충성과 공로(功勞)는 난리 때 나타났고, 지절과 의리는 혼란 때 드러났던 것이다. 88세에 ‘정당(正堂)으로 옮기라’ 하고 그 자리에서 고종명(考終命)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