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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8호 2016년 5월] 뉴스 본회소식

서울대학교 개학 120년의 의의 - 국가 자강을 위해 연합한 지성의 역사

서정화 회장 발행인 칼럼


서울대학교 개학 120년의 의의

국가 자강을 위해 연합한 지성의 역사


서정화 회장



서울대학교가 그 교육의 문을 처음 열었던 구한말, 한반도는 열강(列强)이 모여 갈등하는 장소였으며 그 와중에 국가의 주권에 대한 위협은 나날이 증가하고 있었다. 서울대학교의 개학(開學)은 이러한 국제적 위기에 대한 민족적 대응이었다. 일본이 한반도에 대한 지배권을 장악해가는 와중에 우리 선배들은 민족의 역량을 제고하고 국가의 자존을 도모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선조들이 국가자강과 민족자존을 위해 가장 주목한 것은 교육의 개혁이었다. 구한말의 혼란 속에서도 조선 정부는 공교육을 확충하여 국민 전체의 민지(民智)를 높이기 위해 관립사범학교를, 국가체제를 일신할 수 있는 관료를 양성하기 위해 법관양성소를 설립했다. 의학교를 대한의원으로 발전시켜 선진의학에 정통한 의료인을 양성하는 한편 산업 근대화를 위해 농상공학교를 신설했다. 근대화의 인적, 물적 기반을 만들기 위한 시도의 일환으로 세워진 일련의 신식 학교들이 바로 서울대학교의 전신(前身)이었다. 그리고 오늘날까지 그 맥을 이어오면서 민족발전의 동력으로 활약해왔다.


오늘날 한반도는 구한말 당시와 마찬가지로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 등 열강들의 각축장이다. 특히 세계 양강(兩强)이라고 할 수 있는 미·중이 직접 대립하고 있는 지점임을 감안할 때, 대한민국을 둘러싼 국제적 긴장은 사상 최고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위기를 극복하고 조국을 명실상부한 선진국으로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그 어느 때보다도 민족의 중추에서 국가를 위해 헌신해 온 서울대인들의 새로운 숙고와 분발이 강력히 요청된다. 이것이 바로 서울대학교총동창회가 ‘서울대학교 120년사’를 간행해 서울대인들의 역사를 확립하고 그 정신을 되새기는 이유라 하겠다.


조선은 개항 직후부터 세계 열강들의 압도적인 군사력을 절감하고 스스로의 역량을 강화하여 독립을 도모하는 대신 여러 열강들을 한반도에 끌어들이고 강대국 간의 세력균형을 이용하여 조선을 중립지대로 만들어 국권을 유지하고자 했다. 이러한 태도가 어느 정도 효용을 거둬 국망이 지연되기는 했지만 대신 타국의 끊임없는 간섭을 감수해야만 했다. 그러한 상황에서 조선의 주체적인 개혁작업은 요원한 일이었다. 그 결과 한반도는 청일전쟁, 러일전쟁 등 타국의 전장으로 전락하는 수모를 겪었으며 이는 망국의 비극으로 이어졌다. ‘소극적 중립국론’은 결국 거대한 패착이었던 것이다.


그 결과 우리 조상들은 자신의 힘으로 독립을 얻어내는 데 실패했다. 1945년 광복을 우리 민족의 힘으로 이루지 못했듯이, 조선이 수백년 이어온 중화사대질서에서 벗어난 것 또한 조선의 역량이 아니라 1894년 청일전쟁 때문이었다. 자존과 번영의 토대가 되는 역량을 갖추지 못한 우리 민족에게 독립은 느닷없이 주어졌으며 그만큼 빠르게 퇴색됐다. 결국 우리 민족은 구한말에는 일본에 의한 식민지배를, 해방 이후에는 원치 않는 분단이라는 민족사의 아픔을 감내해야만 했다.


대한민국이 살 길은 위와 같은 실패를 뛰어넘어야만 열린다. 국가의 자존을 지켜낼 수 있는가의 여부는 결국 스스로의 역량에 달려있다. 국제사회가 급격히 다원화돼 세계를 통제할 수 있는 초강대국이 사라진 지금, 우리의 주권을 대신 지켜줄 수 있는 나라는 그 어디에도 없다. 그리고 스스로의 역량을 제고해 국권을 지켜낸다는 책임감을 갖지 못한 민족을 존중해줄 국가 또한 없다.


경제가 국력을 주도하고 지식이 경제를 선도하는 오늘날, 국가의 역량을 제고하는 것은 곧 지식을 생산하는 지성인들의 몫이다. 서울대인은 대한민국 최고의 지성인 집단으로서 조국의 발전을 견인할 수 있는 창의적 지식과 사상을 개발해야 할 책임을 지고 있다. 국가의 성장동력으로서 경제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는 초석이 될 혁신적 과학기술을 개발하고 과학 인력을 양성해야 한다. 세계경제시스템에 개입하여 국가의 경제주권을 지켜내고 새로운 분야에서 국익을 창출해낼 수 있는 금융인재를 양성해야 한다. 확고한 자유민주주의 체제 위에서 선진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사상을 창안하여 대중과 공유해야 한다. 이는 구한말 설립된 관립학교들을 통해 우리 선배들이 품었던 것과 동일한 꿈이며, 세계 속의 선진국으로 도약하려는 대한민국을 위한 서울대인들의 더 큰 꿈이다.


한편 국가의 자존을 가능케 하는 역량은 국가에 대한 자부심 위에서만 축적될 수 있다. 그리고 그 자부심이란 바로 역사에 대한 건전한 이해를 통해 형성된다. 그러나 식민지배라는 엄혹한 현실을 거치면서 서울대학교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사회 전체가 심각한 역사적 갈등을 겪어야만 했다. 서울대학교의 역사를 보면, 구한말 관립학교의 뒤를 이은 법학전문학교, 의학전문학교 등 전문학교생도들은 민족운동을 주도하며 자주독립의 기치를 높였다. 반면 경성제국대학의 학생들은 그 교육자원을 이용하여 아시아 최고 수준의 지성을 연마하고 민족의 번영을 위해 노력했으며, 결과적으로는 해방 이후 국가발전에 큰 기여를 했다. 1946년 통합개교 이후 대한민국 국민들은 서울대인들이 국가의 진로를 통찰할 지성과 민족의 존망에 대한 책임감을 겸비했다고 믿으며 국립서울대학교를 전폭적으로 지지했다. 그리고 서울대인들은 국민들과 함께 대한민국을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이자 아시아 최고수준의 민주주의체제를 건설한 국가로 발전시키는 데 주력했다. 대한민국이 명실상부한 강대국으로 부상할지 아니면 다시 어려워질지 기로에 서있는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현재와 미래를 위해 과거를 포용해낼 수 있는 용기다. 그리고 그 출발은 바로 서울대인의 몫일 것이다.


실로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다. 구한말 관립학교들이 일제강점기 전문학교들로 계승되어 민족운동에 앞장섰으며, 여기에 아시아 최고 수준의 고등교육기관이었던 경성제대가 광복 이후 합류하여 민족자존과 국가자강을 성취해온 국립서울대학교 120년의 역사는 우리의 정체성이며 자부심이다. 본회의 ‘서울대학교 120년사’ 간행을 통해 모교의 역사와 의의를 재조명함으로써 대한민국의 현재 위기를 극복하고 더 위대한 미래로 나아갈 문을 열 저력을 배양하게 되리라 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