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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7호 2016년 4월] 오피니언 동문칼럼

북핵 위기 22년 전과 오늘

정종욱(외교59-65) 모교 정치외교학부 명예교수


북핵 위기 22년 전과 오늘
정종욱(외교59-65) 모교 정치외교학부 명예교수






“잠시 맡겨놓았더니 일이 엉망진창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다시 전면에 나서서 사태를 수습하려 합니다. 이게 조국에 대한 나의 마지막 봉사가 될 것입니다.” 1994년 6월 18일 지미 카터 전 미국대통령이 청와대에서 당시 김영삼 대통령에게 전한 김일성의 말이다. 외교안보수석비서관으로 이 자리에 배석했던 필자가 직접 들은 내용이다.


1994년 봄부터 한반도 하늘에는 전쟁의 먹구름이 잔뜩 끼어들기 시작했다. 국제사회의 거듭된 경고를 무시하고 북한이 4월 말부터 5M 원자로에서 폐연료봉 8,000개를 꺼내 재처리를 강행하자 미국이 군사행동을 추진함으로써 한반도는 전쟁 일보 전의 위기상황에 내몰리게 됐다. 80년대 후반부터 김정일에게 권력을 맡긴 채 2선으로 물러나 있던 김일성에게 사태의 심각성을 전해준 것은 바로 김일성의 외동딸 김경희였다. 딸을 통해 사태의 심각함을 알게 된 김일성이 카터 전 대통령을 평양으로 초청했고 김일성과 회담을 마친 카터는 서울로 돌아오자마자 청와대에서 김영삼 대통령을 면담했다.


카터가 전한 김일성의 제의는 파격적이었다.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찰을 받고 재처리를 중단할 뿐 아니라 남북정상회담도 하겠다고 했다. 장소와 의제에 구속되지 않고 남북의 두 정상이 허심탄회하게 모든 문제를 논의하자고 했다. 이렇게 한반도가 전쟁의 위기에서 벗어나고 남북정상회담을 통해 냉전을 종식시키고 새로운 미래를 설계할 수 있는 기회를 터놓은 김일성-카터 합의는 20일 후 김일성이 갑자기 사망함으로서 무산되고 말았다. 김일성으로서는 “조국에 대한 마지막 봉사”의 기회가 사라진 셈이고 한국은 핵문제를 해결할 호기를 놓친 셈이다. 역사는 그렇게 한반도를 외면했다.


그로부터 22년 후 2016년 봄. 북한의 거듭된 도발행위로 한반도에는 또다시 전쟁의 먹구름이 짙게 드리우고 있다. 북한은 1월 6일 스스로 수소폭탄이라 주장하면서 네 번째 핵실험을 하고 2월 7일에는 장거리 미사일을 발사했다. 수소폭탄인가 아닌가가 중요한 게 아니다. 이런 식으로 가면 북한이 수소폭탄을 보유할 날도 그리 멀지는 않다. 우리가 북의 핵무기를 전가보도처럼 휘둘러대는 북에 꼼짝없이 끌려 다닐 날도 머지않을 수 있다. 정부가 개성공단 전면 중단 등 대북 강경책을 취하고 있는 이유이다.


그러나 2016년 봄 북한의 도발은 스스로를 구제불능의 상황으로 몰아가는 악수 중의 악수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유엔안보리 대북제재안 2270호는 유엔 역사상 가장 강력한 내용을 담고 있다. 미국이 작성한 제재결의안 초안을 읽은 안보리 이사국들이 깜짝 놀랄 정도로 내용이 강력하고 포괄적이다. 중국의 협조가 관건이지만 중국 역시 안보리 결의안의 전면적이고도 성실한 이행을 누차 강조했다. 제재가 대화를 위한 것이라는 게 중국의 입장이지만 제재를 통해 대화를 유도한다는 점에서는 큰 차이가 없다. 우리 정부도 북한이 비핵화를 수용하는 변화를 확실히 보이면 대화의 가능성을 배제하지는 않고 있다.


문제는 북한이다. 지금의 북한은 참으로 이해하기 힘들다. 북한은 인간의 합리성을 무시하는 것을 주특기로 삼고 있다. 비합리성을 합리적으로 역이용하는 것이 벼랑 끝 전술이지만 과연 오늘의 북한이 비합리성의 합리적 이용의 한계를 이해하고 있는지가 의심스럽다. 4차 핵실험에 이어 미사일 발사를 강행한 것은 확실히 북한의 벼랑 끝 전술의 한계를 보여주었다. 중국이 걱정하는 것도 바로 그것이다. 미사일 발사를 강력히 말렸지만 북한은 중국의 충고를 끝내 듣지 않았다. 듣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평양을 방문한 중국 정부의 고위인사에게 모욕감을 주는 행동을 서슴지 않았다. 과거 어느 때보다도 북한의 행동이 불가예측적이라는 게 중국의 고민이다. 더욱 걱정스러운 것은 지금 북한에는 최고 지도자에게 브레이크를 걸 사람이 없다는 점이다. 22년 전 김일성은 이제 존재하지 않는다. 중국의 시진핑 같은 지도자에게 유사역할(surrogate)을 기대하지만 현실은 그렇지도 못하다.


그래서 중요한 것이 우리 내부의 단결이다. 북한으로 하여금 한국과 국제사회의 단호한 결심을 과소평가하게 하는 어떠한 내부 혼선도 배제해야 한다. 정부와 민간을 이간하는 통민봉관(通民封官)은 북한의 대남 전략에서 가장 중요한 내용이다. 북한이 국제사회의 제재에 대해 면역력이 생겼고 제재망에도 허술한 점이 없지 않다고 하지만 북한이 오래 버티기는 힘들다. 그래서 북한이 벼랑 끝 전술을 버리고 비핵화를 수용하기까지 국제사회와 함께 긴밀히 협력하면서 우리부터 일치단결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것이 북한이 개혁 개방의 길로 방향을 틀어 남과 북이 함께 평화통일의 길을 걸어가도록 하는 현실적 해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