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보기

Magazine

[454호 2016년 1월] 기고 에세이

시카고동창회 장학금에 감사하며

박성진(물리02-06)일리노이대 물리학과 박사과정

편지

시카고동창회 장학금에 감사하며

박성진(물리02-06)일리노이대 물리학과 박사과정


안녕하십니까, 저는 서울대 물리학과 2002학번 박성진입니다. 이번 서울대 시카고동창회 장학금을 주셔서 깊이 감사드립니다. 저는 학부를 2006년에 졸업하고 카투사로 2년 군 복무 후, 2008년에 University of Illinois at Urbana Champaign (U of I) 즉 어바나 샴페인 일리노이 대학에서 물리학과 박사 과정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지난 7년 반 전, 박사과정을 시작할 때만 해도 상당히 자신에 차 있었습니다. 물리학과를 4등으로 졸업하고 한국고등교육재단 해외유학장학금을 받았으며, 카투사 경험을 통해 영어도 익힐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미국 대학원의 박사과정은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어려웠습니다. 저는 서울대 물리학과의 학부 교육이 세계 제일이라 생각했는데, MIT, Caltech, Cornell, Columbia 등 유수의 대학 출신의 동기들과 같이 수업을 들으면서, 그게 아니란 것을 알았습니다.


서울대학교는 그냥 주변 누구나 다 나오는 평범한 학교 중 하나였습니다. 그리고는 연구실에 합류했습니다. 저는 단일분자 생물물리학 분야에서 세계적으로 유명한 대가인 하택집 교수님 연구실에 들어왔습니다. 이 연구실은 매해 몇십 개의 논문이 나오고 그 중엔 Nature, Science, Cell 등 최고 수준의 논문들도 매년 서너 개는 나오는 곳이었습니다.


연구실 학생들도 베트남 하노이 국립대학 수석 졸업생 등 각 국가에서 내로라하는 인재들이 모인 곳이었습니다. 이곳에서 저의 존재는 점점 초라해지는 것 같았습니다. 제가 학부 시절 생물학 수업은 하나도 안 듣고, 화학도 잘 모르는 상황에서, 생화학이 주로 쓰이는 이 연구실에 오니 처음에는 적응하기가 매우 힘들었습니다. 사람들이 발표하는 내용도 이해하기 어려웠고, 제게 주어진 과제들은 매우 낯선 것들이었습니다. 특히 학부 때 학점 올리는 데만 급급했지 연구 경험이 거의 없었던 저는 이 낯선 주제들에 대해 연구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앞이 깜깜했습니다. 매주 있는 지도교수님과 Sub-group meeting이 고난의 연속이었고, 일주일 단위로 재계약하는 극도로 불안정한 계약직에 붙어있는 심정이었습니다. 제 연구 초반에 성과가 잘 안 나오자 지도교수님은 하루에 몇 시간을 일하느냐고 물었습니다. 저는 하루에 적어도 8시간은 일하려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지도교수님은 그건 말도 안 된다고 했습니다. 하루 8시간, 5일 근무로 도대체 무슨 수로 Harvard, Stanford에 있는 경쟁그룹들과 경쟁할 수 있느냐고 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일주일에 80시간을 일하려고 했습니다. 어느 한 주는 문자 그대로, 먹고 자는 시간을 제외하고 모든 시간을 연구에 투입한 주도 있었습니다. 이러자 성과가 조금씩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몇 달은 더 걸릴 것으로 생각했던 프로그래밍 프로젝트를 일주일 만에 끝내고, 거의 1년 반 동안 질질 끌던 골치 아픈 문제 하나를 2주일 만에 끝냈습니다. 거기엔 물론 하루에 $15달러를 쏟아부어 필요한 시약들을 몽땅 사들이는 것과 같은 과감한 결정들이 필요했고, 그런 결정들을 승인해준 제 지도교수님의 결단력과 인내가 핵심적이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제 지도교수님의 훈련은 고되었지만, 그 방향은 옳은 것이었고 저는 연구가 어떤 것인지 조금씩 알게 되었습니다. 알고 보니 저희 연구실에서 Nature, Science 등 쟁쟁한 저널에 논문을 쓴 학생들도 다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때로 눈물도 쏟으면서 일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저도 시간이 지나면서 제가 완성한 실험 장비를 통해서 Science 지에 논문이 나오고, 저도 이걸 비롯해 이런저런 저널에 이름을 실으면서 지난 인고의 세월의 열매를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 과정들은 제겐 참 시간이 오래 걸렸습니다. 작년에 결혼도 했지만, 제 주변에는 이미 의사 면허를 따고 벌써 아기를 낳은 서울대 물리학과 동기도 있고, 아이가 둘이나 있으면서도 Nature에 논문을 쓰고 포스트닥터로 U of I에 온 서울대 물리학과 동기도 있었습니다. 이런 친구들에 비해 나는 지난 세월 무엇을 했던가 하는 자괴감도 간혹 들었습니다. 또 결혼 이후 물질적인 도움이 필요해 이곳저곳에 장학금 지원 서류를 넣었지만 넣는 곳마다 번번이 떨어졌습니다. 오히려 저랑 같이 지원했던 아내는 몇 곳에서 장학금을 주는 걸 보면서, 저는 역시 대학원에 너무 오래 붙어 있어서 그런가, 아니면 아직 제1 저자 논문이 없어서 그런가 하는 여러 생각이 들었습니다.


2015년이 되어 미국 온 지 7년이 된 해에, 저와 같이 몇 년을 일하던 포스트닥터가 University of Chicago 즉 시카고 대학 생화학과 교수 자리를 받으면서 제게 포스트닥터로 오라고 적극적으로 권했습니다. 한편 제 지도교수도 존스 홉킨스 대학으로 옮기면서 연구실 전체가 이사를 갈 상황에 놓였습니다. 저는 샴페인에 학생으로 남아있는 아내를 위해서라도 졸업을 해야 했습니다. 졸업 논문을 쓰면서 이렇게 하면 더 잘할 수 있었을 텐데하는 후회도 많이 했습니다. 하지만 서울대 시카고 동창회 이영우 선배님과 김정수 선배님께 들었던 격려를 떠올리고 시카고 서울대 동창회 장학금에 지원했습니다. 어차피 대학원 후반에 된 장학금이 거의 없어서 큰 기대는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저와 제 아내가 동시에 장학생이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 소식을 바로 제 지도교수님에게 보냈는데,


“Congratulations on the well-deserved honor, Seongjin! First of many to come!” 이라는 답을 주셨습니다. 이건 박사 최종심사를 앞두고 지쳐가던 제게 엄청난 격려가 되었습니다. 어쨌든, 제 지도교수님도 서울대 물리학과의 제 오랜 선배님이었던 것입니다.


저는 지난 1113일에 무사히 박사 최종심사를 통과하고 이번 121일부터 시카고대학교에서 포스트닥터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23년 반의 긴 학창 생활을 끝내는 그 마지막 순간에 서울대 시카고 동창회의 장학금이 최종 박차를 가한 것입니다. 동창회 선배님들의 격려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또 부족한 남편이지만 늘 한결같이 내조해준 제 아내에게, 28년 전에 소천한 제 어머니를 대신해 홀로 저를 키운 제 아버지에게, 그리고 제가 박사과정을 미국에서 하는 것에 분명 목적이 있을 걸림을 일깨워준 제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저도 제 지도교수님처럼 뛰어난 학자로 성장해서 서울대학교의 명예를 드높이고, 후배들을 격려하고 지원하겠습니다.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