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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2호 2015년 11월] 오피니언 동문칼럼

서둘러 좋을 것은 없는데

송호근(사회75-79) 모교 사회학과 교수



서둘러 좋을 것은 없는데
송호근(사회75-79) 모교 사회학과 교수







‘다시 찾는 미국사’(America Revisited). 1980년대 초반 미국교과서를 비판한 책이 역사학계를 강타했다. 중고등학교 역사교과서가 남성·백인 우월주의, 인디언학살 은폐, 미국중심주의로 쓰였다는 것이 요지였다. 정계와 교육계를 발칵 뒤집은 이 책은 퓰리처상을 받았다. 교과서 수정 작업이 시도됐다. 그런데 그 수정 교과서는 90년대 초반 다시 도마 위에 올랐다. 너무 좌편향적이라는 것. 우파의 터치가 가미됐다. 역사가 4백년도 안 되는 미국이 이러하니 2천년 역사를 자랑하는 한국이야 오죽하겠는가? 더욱이 중국 중심의 조공체제, 식민지경험, 전쟁과 권위주의, 민주화를 차례로 통과한 근현대사에 이르면 역사학자들의 사관은 여러 갈래로 나뉜다. 보수, 진보 구분만이 아니다. 식민사관, 민중사관, 근대화론, 수탈론, 탈근대화론 등의 시각에 영역별, 세대별, 계보별로 세분된 역사학계의 사정을 감안하면 ‘좋은 역사’, ‘균형잡힌 역사’는 이상에 가깝다.


십수 년 전 미국대학 초빙교수로 갔을 때, 우연히 고등학교용 역사교과서를 살펴볼 기회가 있었다. 딸의 숙제를 거들어줘야 할 형편이었다. 딸이 선택한 미국사 교실은 한 학기 내내 남북전쟁에서 맴돌고 있었다. 한국이라면 전쟁이 발발한 이유, 노예해방, 연방정부와 주정부의 대립, 토지소유를 둘러싼 인종갈등, 전투와 지휘관, 주요 사건의 연도 등을 달달 외웠을 것인데, 딸에게 부과된 발제 주제는 ‘남군의 복장’이었다. 색깔, 스타일, 계급별 차이, 의장의 유형 등, 마치 패션쇼 연구같은 발제문 작성을 도왔다. 딸은 아직도 남군, 북군 복장에 관한 소소한 차이를 기억한다. 스토리였기 때문이다. 역사적 사건들이 오늘날 자신들이 처해진 경험공간 안에서 재현되듯 배웠기 때문이다. 북군의 근거지에 위치한 대학이었는데, 왜 그 교실은 남군에, 그것도 복장에 관심을 갖는지에 대해서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서울대학교 강의실. 국사 만점을 받고 입학한 학생들이 그득한 강의실에서 교수가 묻는다. 정조가 죽자 조선의 대학자인 정다산 선생이 유배형을 받았다. 그 이유는? ‘신유사옥 때문입니다’. 더러 답한다. 신유사옥은 왜 일어났는가? ‘당쟁입니다’. 왜 당쟁이 일어났는가? 침묵. 다산선생은 천주교도였나? 침묵. 한 걸음만 들어가면 침묵이다. 그럼 다른 질문. 유길준 선생은 친일파인가? 이건 어려운 문제다. 물론 침묵. ‘서유견문’의 저자인 것은 아는데, 왜 사대부가 국문으로 책을 썼을까? 이것도 침묵. 국사 만점 학생들이 이러하니 역사교육의 수준을 충분히 짐작한다. 그러니, ‘안중근의사가 사술(射術)에 능한 테러범’이라는 당시 제국 일본의 억지주장에 대항논리가 궁한 것은 당연하다. 의거 장소로 왜 하얼빈을 선택했을까? 이런 질문은 더욱 난감하다.


중국령 러시아 관할 지역에서 대한의군 참모장이 일본군 수뇌를 살해했다. 총성은 동아시아의 복합 교향시였다. 일본은 안의사를 뤼순으로 급히 연행했고 일본 형법을 적용했다. 국제법상 불법이었다. 그리곤 ‘대한의군 참모중장이 결행한 항일거사’임을 일소하고 ‘사격에 능숙한 포수의 무모한 암살’로 규정해 사건을 서둘러 종결했다. 국가차원의 항일조직 존재가 밝혀질 경우 국제적 비난이 쏟아질 것을 우려했던 거다. ‘적국의 포로가 된 한국 의병인 나에게 만국공법을 적용하라’는 안 의사의 주장은 일축됐다. 일본은 사형을 집행할 권한이 없었다. 오죽했으면 조선을 섭정했던 원세개도 안중근의 사형소식에 조시(弔詩)를 바쳤을까. “평생을 벼르던 일 이제야 끝났구려…살아 백세는 없는데 죽어 천년을 가리.” 여기까지 와야 역사적 사건은 현재형이 된다. 스토리가 되어 가슴에 새겨진다. 하얼빈 기차역에 건립된 기념관, 그 역사적 현장에 서면 절로 목이 멘다. 그러면서 역사교육을 받는 가장 중요한 이유, 나의 현재를 만든 그 원형적 질료가 또 다른 시대적 과제를 부여하고 있음을 느낀다. 민족주의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역사란 현재가 갈 방향을 넌지시 알리는 무언의 메시지다.


현행 역사교과서가 부실하고, 편향적임은 대체로 밝혀진 바다. 고대사는 빈약하고, 조선사도 마찬가지, 근현대사가 60%를 차지한다. 일제 식민통치에 대해서는 평가가 확연히 갈리고, 6·25 전쟁 역시 마찬가지다. 전쟁 발발의 국제적 역학에 대한 서술은 거의 없다. 현대사는 어둡다. 교육현장 역시 그러하니 교과서와 교육을 동시에 개혁해야 함은 시대적 과제다. 그런데, 서둘러 국정으로 넘어갈 것은 아니었다. 국정은 결국 또 다른 편향을 낳는다는 사실은 역사교육의 중대한 교훈이다. 문제점을 드러내고, 논의를 시작하고, 개혁방향을 모색하는 순서를 차근히 밟아야 한다. 역사는 시간이다. 신채호 선생이 설파했듯, 역사는 아(我)와 비아(非我)가 상호 투쟁을 통해 발현된 모순이 해소되는 과정으로서 ‘항시적으로 지속되는 가운데’(상속성) ‘더 나은 상태로 진보해가는’(보편성) 끊임없는 운동이다. 분단 때문에 그럴 여유가 없다고? 분단 상황이기에 더욱 그러하다. 그러니, 국정의 당위성을 설득하는 국무총리의 목소리에 힘이 없을 수밖에. 국정(國政)이 역사에 개입해서 ‘균형’에 근접하는 예는 없다.








* 이번호부터 동문 칼럼 필진으로 송호근 교수를 비롯해 이현구(화학공학58-62) 전 한국과학기술한림원 이사장, 송상현(법학59-63) 유니세프 한국위원회 회장, 김형오(외교67-71) 전 국회의장, 서유헌(의학67-73) 가천대 뇌과학연구원장, 김규원(제약72-76) 모교 약학과 교수, 정상욱(수학75-82) 미국 럿거스대 석좌교수, 권영세(법학77-81) 전 주중대사 등이 참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