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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2호 2015년 11월] 인터뷰 화제의 동문

대장장이 이승태 동문

50년 가업 이어받아 제주서 대장간 운영·칼 갈아 10여 년 성금 기부


대장장이 이승태 동문

50년 가업 이어받아 제주서 대장간 운영


칼 갈아 10여 년 성금 기부
대한민국 나눔국민대상 수상





대장간의 힘찬 망치 소리가 희미해진 오늘날 강한 자부심으로 야장(冶匠)의 명맥을 이어가는 이가 있다. 자신의 대장 기술로 이웃과 사회에 나눔을 실천하는 따뜻한 가슴 또한 지녔다. 제주도에서 ‘원일대장간’을 운영하는 이승태(체육교육82-90) 동문 이야기다.


지난 10월 29일 제주시 한림읍 한림민속오일장에서 이 동문을 만났다. 아담한 규모의 시장 한쪽에 자리한 대장간을 찾았을 때 그는 벌겋게 달아오른 쇠를 모루 위에 놓고 골갱이(제주도 호미)를 만들던 중이었다. 열처리를 위해 골갱이 날을 물에 담그고, 화덕의 잔불 정리를 마친 이 동문과 이야기를 시작했다.


“옛날에는 대장간에 사람이 많았어요. 풀무질을 하는 사람이 있었고, 메를 들고 내리치는 사람이 있었죠. 메질할 때 달궈진 쇠를 집게로 잡아 돌려주는 사람이 가장 실력 있는 사람이었고요. 이제는 그런 일을 할 사람이 없죠. 쇠를 두드려주는 자동 해머도 나왔지만, 이곳에선 직접 손으로 때리고 두드려서 만들고 있습니다.”


대장간 매대에는 이 동문이 만든 부엌칼, 낫, 괭이, 작두와 육지에선 보기 힘든 골갱이, 호맹이(바다에서 쓰는 호미) 등이 즐비했다. 전통적인 방식으로 수백번의 망치질과 담금질을 거쳐 만든 그의 상품들은 단단하고 만듦새가 야무져 한 번 쓴 사람들은 꼭 다시 찾는다.


이 중 효자 상품은 ‘제주 호미’인 골갱이. 제주의 밭은 돌이 많아 호미 앞부분이 넓으면 들어가지 않고, 끝이 가늘고 좁은 형태의 골갱이를 써야 한단다. 이 동문은 “골갱이는 만들어도 만들어도 모자란다”며 “2, 3월이면 더욱 불티나게 팔려나가기 때문에 봄이 오기 전 하루 2백개씩 만들어 넉넉히 쌓아둔다”고 말했다. 귀농 인구가 늘면서 농기구 수요도 늘었다는 그의 설명이다.


이날은 늦가을 감귤 수확에 일손이 집중된 데다 벌초철도 지나 무뎌진 칼이며 낫을 갈아달라는 손님들이 주로 찾아왔다. 입맛대로 기구를 자르거나 만들어 달라고 문의하는 손님도 있었다. 벌초철이면 문전성시를 이룬다고 했다.


이 동문은 선친인 고 이원일 씨의 가업을 이어받아 10여 년 전 대장장이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도내에 남아 있는 6명 남짓의 대장장이 중 가장 ‘젊은 피’다. “50년 이상 대장장이의 삶을 살았던 아버지에 비하면 아직 많이 부족하다”는 그는 작고한 선친이 사용하던 모루와 망치를 물려받아 작업하고 있다. 선친 대부터 단골 손님도 많다.


“쇠의 성질을 알아야 작업하기가 편한데, 아직은 시간이 걸려요. 아버지는 망치로 몇 번 때려 보고 강도가 어느 정도겠다는 것까지 아셨죠. 똑같은 물건도 훨씬 쉽게 만들고, 예쁘고 쓰기 편하게 만드셨어요.”


지금에 이르기까지 고민도 많았다. 축구를 잘했던 이 동문은 제주제일고를 졸업하고 모교 체육교육과에 입학했다. 원희룡(공법82-89) 제주도지사와 고교 동기동창이다. 여동생인 이의진(불어교육86-92 서울 남부지법 판사) 동문도 모교에 진학하면서 뭍으로 ‘유학’보낸 남매들은 부모님의 자랑이 됐다. 졸업 후 이 동문은 짧게 교편을 잡았지만 곧이어 시작한 사업들이 모두 실패하며 긴 어둠의 터널을 지나야만 했다.


오랜 방황 끝에 그는 제주로 돌아왔다. 대장장이인 아버지가 평생 불 앞에서 땀 흘려 쇠를 두드려온 고향이었다. 잠시 가업을 도울 요량으로 대장간 일을 거들면서도 몇 년간은 마음 둘 곳 없이 보냈다. 그러다 점차 일이 적성에 맞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는 “네가 할 일이 아니다”라며 반대했지만 어릴 적부터 어깨 너머로 보고 배운 것이 있어 금세 익힐 수 있었다.


“처음에 장에 나올 때는 많은 용기가 필요했어요. 저를 아는 고향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죠. 그래도 그럭저럭 장사가 되는 것을 보면 ‘서울대 나온 사람이 오일장에서 장사한다’는 시선이 어쩌면 홍보가 됐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은 마음이 아주 편안해요. 건강이 허락하는 한 계속할 수 있고, 정년 퇴직도 없는 이 일이 만족스럽습니다.”




낫을 갈고 있는 이승태 동문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칼 네 자루와 낫 한 자루를 갈아달라며 맡겨놓고 간 손님이 돌아왔다. 조그만 과도는 1천원, 나머지는 한 자루당 2천원씩 수고비를 받았다. ‘비용은 모금함에 넣고 가시라’는 말에 손님도 익숙한 듯 그렇게 했다. 그렇게 1년 동안 모인 지폐들이 가게 한 편 모금함 내에 수북했다.


그는 2003년부터 매년 이렇게 모은 수십만원에서 수백만원의 성금을 백혈병·소아암 환자, 불우이웃에게 기부해왔다. 2013년 대한민국 나눔 국민대상에서 보건복지부장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모금을 시작하게 된 건 사실 ‘나를 위해서’였습니다. 이왕 일을 시작하는 김에 뜻있는 일과 병행하면 오일장에서도 더 빨리 자리 잡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우연히 TV에서 소아암 환자들이 고생하는 것을 보고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고 싶어 칼을 간 수익금의 일부를 기부하기로 맘먹었어요. 그리 넉넉한 형편은 아니지만 제주의 ‘조냥 정신’(절약 정신)에 부합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동문은 제주민속오일장과 한림민속오일장 두 곳에서 대장간을 운영한다. 제주에서 가장 큰 오일장인 제주오일장은 매월 2일과 7일로 끝나는 날, 한림오일장은 매달 4일과 9일로 끝나는 날 열린다.


장이 서지 않는 날이면 그는 아내와 올레, 오름 등을 찾으며 오붓한 시간을 보낸다. 슬하의 2남 2녀는 모두 장성시켰다. 1주일에 한 번은 고교 동창 선후배와 축구를 즐긴다. 모교 재학 시절 축구부에서 맡았던 포지션은 골키퍼. 그의 ‘버킷 리스트’ 중 하나는 유소년 축구팀 감독으로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이다. 이 동문은 “버킷 리스트에 ‘영화배우 데뷔’도 있다”고 살짝 덧붙이며 웃음지었다. 왕년에 ‘길거리 캐스팅’도 받아봤다고 한다.
‘서울대 출신’이라는 수식어는 한때 스스로를 괴롭히던 말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 동문은 모교를 떠올리며 “참 좋은 학교였다”는 말을 거듭했다. ‘사람이 좋다’는 이유에서다.


“나이가 들수록 친구들밖에 없잖아요. 전 서울대에서 만난 사람들이 참 좋았어요. 제 동기들 모두 선하고 참 좋은 사람들이거든요. 만나면 반가워 어쩔 줄 모르겠고, 허물없이 웃고 이야기할 수 있는…. 그런 친구들과 선후배를 알게 해준 서울대가 저에겐 참 고맙고 좋은 학교입니다.” <박수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