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0호 2024년 11월] 인터뷰 화제의 동문
네팔 출신 모교 박물관 연구원…줄다리기 연구로 석사학위
러실라 (대학원20-23) 모교 박물관 학예연구원
네팔 출신 모교 박물관 연구원…줄다리기 연구로 석사학위
러실라 (대학원20-23)
모교 박물관 학예연구원
한국 민속 매료돼 인류학 전공
기획전 ‘수리수리 보존수리’ 화제
감쪽같이 성하다. 우리가 보는 박물관 유물들은 그렇다. 덕분에 깨지고 부서지고 빛바랜 유물을 온전한 모습으로 선보이기까지 과정에 대해선 좀처럼 생각할 일이 없다. 이따금 토기에서 조각조각 이어붙인 흔적을 발견하고 ‘저걸 어떻게 다 맞췄을까’ 감탄하는 정도다.
모교 박물관 기획특별전 ‘수리수리 보존수리’는 잘 알려지지 않았던 박물관의 일, ‘보존수리’에 집중한 전시다. 11월 1일 박물관에서 전시 기획과 진행을 맡은 러실라 마하르잔(Rashila Maharjan) 학예연구원을 만났다. 갓 보름을 넘긴 전시회 반응을 묻자 “크게 홍보도 못 했는데 지난 토요일에만 500명이 다녀갔다”며 기쁘게 웃었다.
“박물관 개관 이래 매해 보존수리를 해왔지만 한 번도 공개한 적이 없었어요. ‘박물관이 도대체 무슨 일을 하는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유물을 보관하는 것뿐만 아니라 다음 세대에 전달하기 위해 수리하는 것도 중요한 우리의 일이란 걸 알려주고 싶었어요.”
유물을 고치는 ‘수리’나 원 상태로 되돌리는 ‘복원’ 대신 보존수리란 말을 쓴 건 “유물 본래의 가치를 더 나빠지지 않게 보존한다”는 섬세한 의도를 표현하고 싶어서다. 토기, 탈, 관모, 목가구, 서화, 금속 등 유물 종류와 물성에 따른 보존수리 방법을 간결하고 알기 쉽게 보여준다. 여기엔 “원래의 모습을 바꾸지 않는다·꼭 필요한 부분만 최소한으로 수리한다·최대한 오랫동안 보존되도록 한다”는 세 가지 원칙이 관통한다.
‘원래 모습을 바꾸지 않는다’는 원칙이 잘 보이는 게 토기류다. 깨진 조각을 수습해 맞추는 게 핵심인데, 전시된 백제 토기는 조각을 붙인 뒤 합성수지로 빈 부분까지 보강해 놓고 입 부분은 깨진 그대로다. “거울이나 옥 같은 귀한 물건을 일부러 깨고 조각내는 ‘훼기’를 하던 시대예요. 주로 무덤과 제사 유적에서 발견되죠. 의례용 물건을 일상 물건과 구분하고 다시 사용하지 않게 하려는 뜻이 담겼기에 깨진 부분을 붙이지 않았어요. 매장 유물을 보존수리할 땐 이렇게 출토 맥락도 살핍니다.”
문효세자 책봉 의례를 기록한 문효세자 책례도는 본래 한 폭씩 액자로 존재하던 것을 8폭 병풍으로 연결했다. 국가 행사를 기념해 만든 ‘계병’의 원형을 되돌리기 위해서다. 기존의 배접을 제거해 세척하고 다시 배접하는 서화 수리엔 수개월이 걸린다. “서화는 보존도 까다로워요. 최근 한 관객께서 서화 쪽 불이 너무 어두워서 잘 안 보인다고 말씀하셨는데, 유물 보존엔 습도뿐만 아니라 온도와 불빛의 영향도 크거든요. 서화가 불빛을 쐬면 색이 변질될 수 있어 최소한의 조명만 쓰고 있다고 이해를 부탁드렸죠.”
전시 유물은 고고역사부·전통미술부·인류민속부 등 박물관 각 부서에서 선별한 것. 2017년부터 국가유산청의 지원을 받으면서 인류학, 민속학 분야 소장품도 보존수리할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박물관 하면 금속류, 선사시대 유물만 생각하고 민속품은 잘 모르시는 것 같더라고요. 친숙하다 보니 가치가 떨어진다는 편견도 있는 것 같고요. 그래서 더 강조하고 싶은 욕심이 있었어요.”
천연 재료로 만들어 잘 손상되고 구겨지는 관모는 감쪽같이 꿰매고 펴서 내놓았고, 탈은 갈라지고 벗겨진 부분을 메우고 칠해 선보였다. “탈의 경우 어디에 쓰였는지에 대해 학계 이견이 있어요. 보존수리를 소개하자는 의도에 집중할 겸 과감히 설명을 줄였죠. 대신 힌트가 될 만한 탈 안쪽 사진을 함께 뒀으니 잘 살펴보세요.”
'수리수리 보존수리'전에 전시된 바가지 탈과 목각 탈들.
'수리수리 보존수리'전에 전시된 조선 후기 죽전립.
‘수리수리 보존수리’는 지난해 9월 박물관에 부임한 러실라 동문이 처음 기획한 전시다. 네팔 카트만두 출신인 그는 고교 졸업 직후인 2015년 한국으로 유학 왔다. 국어국문학을 전공하며 민속에 관심을 갖게 돼 모교 인류학과 대학원에 진학했다. “판소리, 민요 같은 한국 민속문화가 재밌었어요. 한국은 민속 연구가 잘 돼 있고 기록도 남아 있어서 신기했죠. 네팔은 민속문화가 잘 전승되고 있지만 기록하는 사람은 드물어 아쉬웠거든요. 민속학 전공 교수님이 계신 서울대 인류학과라면 최고의 민속학을 공부할 수 있을 것 같았어요.”
전시에선 유형의 유물을 다뤘지만, 개인적으론 무형 유산의 보존에 관심을 뒀다. 충남 당진 기지시의 전통 문화인 줄다리기 연구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6개월 동안 당진에 머물면서 줄다리기 문화를 전승하는 마을 사람들과 어울리고 이야기를 들었다. 논문에서 그는 “한국은 줄다리기 같은 무형문화유산의 유네스코 지정에 어느 나라보다 힘을 쏟는데, 여기엔 양면이 있다”고 지적했다.
“전승에 관심 갖는 것과 지정에 관심을 가지는 건 달라요.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재되면 보존은 되겠지만 자연스레 문화가 전승되고 변화하긴 어려워지죠. 무형 유산을 잘 보존하려면 등재에 만족하지 않고 청년 등 다음 세대에게 알리는 데 힘써야 한다고 생각해요.”
전시의 마지막 부분엔 특별한 사연이 있다. 장일무 모교 약대 명예교수가 청전 이상범, 춘곡 고희동 등이 그린 서화를 기증하며 수리 비용까지 쾌척했다. 유물 보존을 위한 펀딩이 활발한 해외 박물관과 달리 국내에선 매우 드문 일. 내 품을 떠난 유물의 장래까지 헤아린 혜안이 생각거리를 준다.
“덕분에 올해 4월에 기증 받은 유물을 빠르게 수리해서 공개할 수 있었어요. 수리나 관리 비용 문제로 유물을 선뜻 기증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기에, 이런 후원이 큰 힘이 됨을 알리고 감사한 마음을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모교 박물관은 꾸준히 전문 인력을 충원하면서 자체 보존수리 역량을 강화하고 있다.
러실라 동문은 2년간 학예연구원으로 근무한 뒤 학예사를 준비할 예정이다. “서울대 학생 중에도 박물관에 대해 모르는 분들이 많아서 아쉬워요. 이번 전시로 서울대생과 일반 관람객에게 박물관의 보존수리 역할이 널리 알려졌으면 합니다.” 전시는 내년 3월 29일까지 열린다.
박수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