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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1호 2015년 10월] 오피니언 동문칼럼

내 마음에 나무심기

이유미(임학81-85) 국립수목원장


내 마음에 나무심기




어느 순간 그 길고 덥던 여름이 훌쩍 지나가 버렸습니다. 유난히 밝던 보름달도 다 기울어졌습니다. 하루 비바람에 기온마저 뚝뚝 떨어져 버리고 하루가 다르게 초록빛 무성하던 숲의 나무들은 그 빛이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참 좋은 계절 가을입니다.


  제가 일하는 국립수목원에서 가장 먼저 가을을 알리는 나무는 계수나무입니다. 부챗살처럼 아름다운 가지를 펼쳐내는 큰 나무에 동글동글 심장을 닮은 잎새들은 참으로 귀엽기만 합니다. 이즈음이면 수목원의 그 많은 나무들 중 어느 나무보다 먼저 계수나무 잎들은 노랗게 물들지요. 더욱더 멋진 일은 이때 향기가 난 나는 점입니다. 그것도 솜사탕처럼 더없이 달콤한 향기가 가을 대기에 퍼지고 나면, 어느새 입가에 미소가 떠오르고 세상의 어떤 복잡했던 일도 잠시 내려놓게 됩니다.


수목원의 가을은 특별히 아름답습니다. 세상의 다양한 나무들이 모여 있다 보니, 나무들마다 다 각기 다른 단풍 빛이 어우러져 참으로 절경을 이루지요. 그 풍광에 빠져 있다 문득 떠오르는 생각은 ‘나무들 참 대단하다’입니다. 사실 단풍이라는 것은 보기엔 좋지만, 나무들 입장에서는 모진 겨울을 앞에 두고 더 이상의 생장을 포기한 채, 엽록소가 파괴되고 숨어 있던 색소들이 나타나거나 생겨나는 현상으로 그야말로 비장한 순 갈이일 터인데 그 절대적인 어려움을 앞에 두고 저토록 아름답게 발현할 수 있는 존재가 또 있을까요! 잘 포장을 해도 어려움 앞에선 본성이 나타나는 사람과 비교해보면 더욱 그러합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오래 묵을수록 기품 있고 큰 그늘을 만들면서도, 굵은 줄기엔 더 이상 수액이 통하지 않아 굳어가면서도 매년 봄이면 새롭고 여리고 보드랍고 싱그러운 새순을 내어놓을 수 있는 존재가 어디 그리 흔할까요! 정말 ‘나무처럼’이고 싶다는 간절한 바람을 가져봅니다.


이 멋진 존재, 나무를 한번 마음에 심어보십시오. 바쁘게 살아가는 일상을, 숨 가쁘게 달려가는 인생의 한켠에 나무가 서 있을 수 있다면, 나무를 좀 더 많이 만나는 사람으로서 장담하건대 삶의 빛깔이 바뀝니다. 글자로 읽힌 나무의 유형 무형의 가치는 수없이 알고 계시겠지만, 마음으로 나무를 내 삶에 담아보면 나무는 고개를 들면, 손을 내밀면 언제나 곁에 있는 친구가 되어 위로로 치유로, 때론 영감으로 시시각각 변화무쌍한 모습이지만 절대로 변심하지 않고 그렇게 그렇게 곁에 있을 것입니다.


지금부터 시작해 보십시오. 주말에 숲길을 나서도 좋고, 아니면 사무실 창가, 아파트 현관을 나서며 잠시 멈추어 서서, 마음을 열어 바라보십시오. 여러분이 바로 눈부신 친구 나무를 만나는 순간입니다. 그리고 소곤소곤 말을 건네주십시오. “내 친구 은행나무 네가 거기 서 있었구나” “내 친구 메타세콰이어 이제 보니 너 참 늠름하구나.” “네 친구 상수리나무 올해는 도토리 좀 많이 열었니?” “친구야 반갑다!”


들꽃은 덤입니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나태주 시인의 들꽃이라는 짧지만 절대 공감 가는 ‘들꽃’이라는 시처럼 만나지는 쑥부쟁이, 구절초, 산국, 꽃향유…. 가을 들꽃들의 서늘한 향기로움은 덤으로 드리는 선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