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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7호 2015년 6월] 뉴스 본회소식

[서울대와 6 25] 인터뷰 : “졸업 후 전쟁 참전해 전사한 동문도 발굴해야”

홍두승 모교 사회학과 명예교수


1996년 개교 50주년 때 6?25 전몰자 발굴 주도


 ‘서울대와 6?25’ 기획을 준비하면서 제일 먼저 떠오른 인물이 홍두승(사회68­72) 모교 사회학과 명예교수다. 서울대 문화관 대강당 로비 벽에 새겨진 ‘서울대 재학생 한국전쟁 참전 전몰자비’가 그의 작품이기 때문이다. 1996년 당시 교무부처장으로 있으면서 전몰 동문 발굴에서 이름을 새길 돌 선택까지 모두 그의 주도로 이뤄졌다. 군인 집안에서 태어나, ROTC 장교로 복무하고, 군사회학을 전공한 그에게 6?25 참전 순국 동문들은 특별할 수밖에 없었다.

 지난 5월 20일 사용후핵연료 공론화위원장을 맡아 마지막 정리 작업에 한창인 홍 명예교수를 서울 명동 사무실에서 만났다. 사용후핵연료 공론화위원회는 6월 모든 임무를 마치고 해산한다.      



 -1996년 개교 50주년을 기념해 재학생 6?25 전사자 명단을 발굴하셨는데, 배경 설명을 해 주시죠.
 “1995년 3월부터 1997년 3월까지 교무부처장을 맡았어요. 1996년 개교 50주년 행사를 준비하면서 6?25 전쟁에서 전사한 서울대 재학생들의 명단을 찾아내 명예졸업증서를 수여하고 추모비를 만들자고 제안했습니다. 처음에는 졸업한 동문과 베트남전 참전 순국자까지 찾아내자고 했으나 너무 방대해서 재학생으로 범위를 좁혔어요. 미국, 영국의 유서 깊은 대학들은 참전한 동문들을 기리고 있거든요. 늘 아쉬운 마음이 있었는데, 당시 보직교수회의에서 저의 제안이 수용돼 사업을 진행하게 됐죠. 군사회학을 전공한 저로서는 기쁜 일이었죠.”


 -명단 발굴이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
 “학적과 자료를 살펴보니 참전 기록이 안 돼 있어요. 국방부의 전사자 명단에는 학교 기록이 없고요. 어떻게 찾아야 할까 고민하다 전사했다면 미등록 됐을거란 생각이 들었죠. 당시 미등록제적(학사 등록을 하지 않아 제적된 것) 파일은 따로 보관돼 있었습니다. 전쟁기간인 1950년 6월부터 1953년 7월까지 미등록 제적자를 살펴보니 1천1백명이 넘더군요. 그 명단을 갖고 전쟁기념관 전사자 명부와 대조해 봤습니다. 전사자 명단이 약 15만명 됩니다. 당시 전쟁기념관 이재전 관장님이 적극 도와주셨고, 학적과의 김춘섭 선생님이 굉장히 애를 많이 썼습니다. 그랬더니 5명 정도가 서울대 재학생으로 추정돼요. 유족들에게 폐를 끼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으로 주소 찾기 등 행정작업 등을 학적과 직원들이 다 했어요. 그럼에도 결국 한 명만 동문으로 확인됐습니다. 1천1백명 미등록 제적자를 15만 전사자 명단과 대조해 한 명 찾은 거죠.
 다른 방법을 찾아야겠다 싶어 서울대 출입기자들의 힘을 빌렸습니다. 서울대생 전사자를 찾는다는 보도가 나가면서 연락이 오기 시작했어요. 어떤 분들은 전사통지서를 가져오시기도 했고요. 전사자들이 대부분 미혼이어서 그분들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소수인데, 모친이 살아 계신 경우가 있었고, 다수의 경우는 조카들이 신고를 해 왔습니다. 그렇게 해서 23명의 동문을 찾아냈어요.
 지금 문화관 벽에 기록된 것을 보면 간단한데, 사실 언제 어느 전투에서 전사했다는 기록까지 다 찾아냈습니다. 국립현충원에 가면 매화장 보고서라는 게 있어요. 군인이 사망하면 군의관이 의견을 써놓는 겁니다. 그것까지 일일이 다 체크를 했죠. 전사 지역이 확인이 안 되는 경우엔 소속 사단에 직접 전화를 걸기도 했어요.“


 -그렇게 힘들게 찾았는데, 기념비는 발길이 뜸한 곳에 만들어졌어요.
 “장소 정하는데 의견이 분분했죠. 사실은 문화관 대강당 옆에 전시실로 쓰이는 공간을 생각했다가 잡음이 많아서 문화관 대강당 벽에 설치하게 됐습니다. 좀 외지긴 했지만 모든 사람들이 모이는 공간이란 의미도 있었고요.”


 -좀 더 크게 만들 계획은 없었나요.
 “대학본부 앞에 충혼탑을 제안하기도 했죠. 문화관 벽면에 이름 새기는 것도 의견이 분분했는데, 충혼탑 건립은 예산 등의 문제로 논의조차 어려웠습니다.” 


 -대강당 벽면에는 29명이 기록돼 있습니다. 6명은 그 이후에 발굴된 것이군요.
 “개교기념 행사를 마친 후에 4명의 유족에게 연락이 와서 확인해 보니까 동문이 맞아요. 그 중에 한 분이 연세대 문정인 교수의 장인인 김세환 동문입니다. 국문과 4학년 때 소위로 참전했다가 전사하셨어요. 그 외 두 명은 저는 잘 모르겠지만 확인이 돼서 올라간 것으로 압니다.
 29명 동문 외에도 작년에 조선일보에서 ‘서울대 전쟁기념 시설 조성한다’는 기사가 나가면서 김영도(철학48­56)동문이 함께 학도병으로 갔다가 전사한 한평교 동문의 명단을 주시기도 했고요. 또 한희영 전 경영대 학장님이 그 분의 형님 한진영 동문의 기록을 주시는 등 총 9명의 추가 명단이 입수돼 얼마 전 기획처에 전달했습니다.“


 -이번에 주신 명단과 모교에서 확인 중인 동문을 포함하면 전체 전몰 동문 수는 40명이 넘겠네요. 물론 최종 확인이 돼야 하지만요.
 “육군본부의 학도의용군 자료에는 서울대 재학생 전사자가 43명인가, 46명인가로 나와요. 명단 없이 숫자만 나와 누구인지 확인은 어렵고요. 사실 그 이상이 참전해 희생됐을 텐데, 다 밝혀낼 수 없는 게 안타까운 일입니다.”


 -동문 확인 작업에서 학적과 기록이 기본이 됩니다만, 학적과에 없는 경우도 많지 않을까요.
 “6?25 전쟁 중 소실된 자료가 많아요. 성적표 뒤에 아무것도 안 써있는 경우도 있고요. 1950년 그 해는 6월 1일이 개강이었어요. 입학해서 3주만에 전쟁이 난 겁니다. 당시 입학생들은 동기들도 확인해 주기 어려운 상황입니다.”


 -유족들이 사진이나 문서 등의 증거 자료를 가져오면 학적부에 없어도 인정을 해 주나요.
 “관련된 자료들이 있다면 대학에서 판단을 할 겁니다.”


 -마지막으로 모교에 한 말씀.
 “전장에서 죽은 사람을 기념하는 것은 죽은 사람들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살아 있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죠. 살아 있는 사람들이 조국을 위해 죽어 간 사람들을 느끼며 살게 함으로써 다른 사람들도 죽으면 그와 같이 대우받고 기려질 것이라는 강력한 증거물이 됩니다. 지금까지 서울대 재학생 중에서 전사자 명단을 찾는 데 많은 신경을 써왔는데, 앞으로는 졸업생 중 전사한 분들의 명단을 찾는 데도 관심을 가져야 할 것 같습니다.” <김남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