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8호 2024년 9월] 뉴스 모교소식
“줄 한번 싹 가는 게 소원…악기는 낡았어도 국악에 진심”
동아리 탐방 국악동아리 ‘여민락’
동아리 탐방
“줄 한번 싹 가는 게 소원…악기는 낡았어도 국악에 진심”
국악동아리 ‘여민락’
가야금·해금 등 5개 악부 구성
국악과 신입생 ‘사부’ 지도받아

여민락 부원들이 여름 수련회가 열린 숙소에서 합주 연습을 하고 있다. 사진=여민락
매년 4월 국악동아리 여민락(與民樂)에선 ‘사부 시연회’를 연다. 국악 전공자 ‘사부’들이 가야금, 거문고, 대금, 피리, 해금을 연주하는 행사로 신입 부원들에겐 무척 중요한 시간이다. 연주를 듣고 마음에 든 악기를 1, 2, 3지망으로 적어 내면 이를 바탕으로 악부가 정해지기 때문이다. 이제부턴 이름 옆에 ‘97해금’, ‘24거문고’처럼 악부와 연도가 붙으니 돌잡이만큼 설레고, 전공 선택만큼 신중해진다.
9월 4일 학생회관 동아리방에서 이서희(농경제사회22입), 박유란(통계22입) 공동 대표와 마주 앉았다. 동아리 홍보물에서 ‘겨울엔 뜨끈뜨끈 몸이 녹아내린다’고 자랑한 전기 온돌방이다. 국악기는 대부분 앉아서 연주하기에 바닥 난방이 필수다. 사람 키만 한 가야금 몇 대를 펼칠 만큼 제법 넓지만 박유란 대표가 “다 같이 합주는 못 하고, 따로 연습실을 빌린다”고 설명했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여민락은 정악(正樂) 동아리. 1980년 결성한 단소 풍류회가 시초다. 궁중과 양반가에서 연주하던 정악 악기들로 5개 악부를 이뤘다. 현재 40명의 회원이 활동 중이다. 국악과 전공생 한 명 없이, 국악을 처음 접하는 이들도 자신있게 받아들이는 건 ‘사부 제도’ 덕이 크다.
“사부들은 여민락의 각 악부를 담당하는 분들이에요. 매년 국악과 신입생 분들이 맡아 주시는데, 가까운 나이여서 친근하게 가르쳐주고 가르침 받을 수 있죠. 사부들과 선배님들의 가르침을 받아 주 2~3회 악부별로 모여서 연습합니다.”(이서희)
“4월에 처음 악기를 잡고, 5월부터 연습을 시작해 7월쯤 되면 합주가 가능하다”는 설명. 8월엔 여름 수련회가 열린다. 대성리 등을 찾는 건 여느 동아리 MT 같지만, 너른 방에 한바탕 악기를 벌여 놓고 수십 명이 국악기를 연주하는 모습은 이색적이기까지 하다.
“매년 여름과 겨울방학에 악기를 들고 가서 합숙 연습을 해요. 하루 4~5시간 정도는 연습하도록 시간표를 짜죠. 신기하게도 여름수련회를 다녀오면 소리를 예쁘게 맞춰보려고 노력할 수 있는 정도로 발전해요. 여름 전까지는 동아리 이탈자가 있어도, 여름수련회를 거친 부원들 중에 연말 정기공연에 서지 않는 부원은 없어요.”(이서희)
취미라기엔 진지하고 깊다. 국악에 푹 빠지게 된 이유가 궁금했다. 거문고 악부인 이서희 대표는 “처음엔 그렇게 국악에 진심은 아니었는데 하면 할수록 잘해보고 싶단 욕심이 들었다. 열심히 연습에 나오다 보니 사람들이 좋고, 같이 하는 시간이 좋아서 여기까지 왔다”고 말했다.
“거문고 신입은 첫 여름까지 연주할 때 쓰는 골무를 못 쓰게 하는 전통이 있어요. 손가락 힘을 길러야 하는데 골무를 써버릇하면 현을 미는 감각을 익히기 어렵다고요. 신입일 땐 얼른 끼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나중엔 골무 안 낄 때 연습 더 많이 할 걸 싶었죠.”
박유란 대표는 “우연히 국악과의 가야금 공연을 보고 소리가 너무 예뻐 여민락에 들어왔다”고 했다. “국악기라서 느낄 수 있는 소리들이 있어요. 바이올린은 볼륨을 굉장히 크게도, 작게도 낼 수 있는데 가야금은 아무리 크거나 작게 내려 해도 그 폭이 넓지 않거든요. 오히려 그래서 더 담백함이 있죠. 연주자의 자세도 멋있고요.” 올해 가야금에 이어 아쟁 연습도 시작했다. 2년차부터 악부별로 비슷한 악기인 아쟁과 소금, 태평소 등을 연주할 수 있다.

여민락 부원이 신입부원을 지도하고 있다. 사진=여민락
여민락의 가장 큰 고민거리는 악기. 산조 가야금, 정악 가야금, 25현 가야금 등 가야금 10여 대를 비롯해 악기별로 7~8대씩 보유하고 있다. 개인 악기 없이도 활동할 수 있는 건 편하지만, 낡아가는 악기 관리가 쉽지 않다. 100년도 쓸 수 있는 바이올린과 달리 국악기는 수명이 10년 남짓으로 짧은 편. 1980년대 선배들이 써서 ‘88가야금’, ‘86거문고’ 등으로 불리는 악기가 이곳에선 놀랍게도 현역이다. “거문고 수리를 하려고 알아봤더니 여섯 줄 전부 가는데 33만원이라고 하더라고요. 고쳐야 할 악기가 한두 대가 아니라 하는 수 없이 제일 급한 것부터 조금씩 고치고 있어요.” 박유란 대표의 말이다.
사정이 이러니 부원들은 전문가에게 맡겨야 할 조율도 ‘셀프’로 한다. “줄이 짱짱해야 소리가 예쁘게 잘 나거든요. 공연 전엔 부원들이 다같이 모여 양쪽에서 줄을 쭉쭉 붙잡아 당기고 있어요. 느슨하면 풀고, 다시 당기고….”(박유란) “부원들이 늘 하는 말이, 자기가 부자 되면 가야금이랑 거문고 한 대씩 새로 사주겠대요(웃음). 새 악기는 엄두도 못 내고, 국악사에서 전문가 손으로 줄이라도 전부 교체하고 조율도 받아보는 게 소원이에요.”(이서희)
클래식과 달리 국악 곡은 악보 구하는 데도 애를 먹는다. 판매하는 악보가 너무 비싸거나 시중에 없어 연주하고픈 곡이 있어도 마음껏 못 고를 때가 많다. 귀 밝은 ‘채보 장인’이 한 명씩 있어 청음으로 악보를 그리고, 원곡자나 타 대학 동아리에 수소문해서 해결한다.
이런 사정을 아는 선배들은 매년 가을 창립총회에 찾아와 후배들에게 십시일반 모은 지원금을 전달한다. 얼마 전 동아리 인명록을 정비해 초창기인 1980년대 선배와도 연락이 닿는다. 졸업 후 아마추어 국악관현악단에서 활동하거나 경연대회에서 입상한 선배들도 있다. 이달 말 창립총회를 연다.
9월을 맞아 부원들은 성큼 다가온 정기공연 준비로도 분주해졌다. 연습은 물론이고, 다같이 맞춰 입을 한복도 고른다. 매년 연말 정기공연엔 동문 선배들도 무대를 준비해 같이 서거나 조명, MC 같은 스태프로 참여한다. 국악계에 새로운 시도가 빈번하듯, 여민락에서도 국악기로 가요나 영화음악을 연주하는 일이 낯설지 않다. 그래도 선배들은 “정악으로 출발한 동아리란 걸 잃어선 안 된다”고 당부한다.
“정기 공연에서 모든 연주자가 한 곡씩은 정악을 연주해요. ‘타령군악’과 왕의 장수를 축원하는 ‘수연장지곡’ 외 다양한 곡을 준비 중입니다. 12월 21일 오후 4시 관악캠퍼스 기숙사 가온홀에서 열립니다. 여민락의 1년이 담긴 공연 많이 보러와 주세요.”

매년 연말 열리는 여민락 정기 공연에선 한복을 맞춰 입고 정악 등 다양한 레퍼토리를 선보인다.
박수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