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5호 2023년 8월] 뉴스 본회소식
“자식하고 대화 안 되는 사람이 회사에서 소통될까요”
“자식하고 대화 안 되는 사람이 회사에서 소통될까요”
관악경제인회 조찬포럼
권오현 (전기공학71-75)
모교 이사장·삼성전자 상근고문
세계적 혼란 리더십 부재 방증
시간 절반은 미래 생각해야
“전 세계적인 혼란은 곧 전 세계적인 리더십의 부재를 의미합니다. 믿을 수 있는, 존경할 만한 리더가 부재하는 현실은 국내에서도 마찬가지죠. 옛날엔 진짜 대단한 분들이 많았는데, 요새 사람들이 갑자기 다 멍청해졌느냐?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실패를 회피하기 위해 도전을 기피하는 풍조, 미래를 내다보기보단 현재의 틀에 갇힌 사고 때문에 리더십이 실종됐다고 생각해요.”
관악경제인회가 7월 20일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제1회 조찬포럼을 개최했다. 이부섭(화학공학56-60) 회장, 이희범(전자공학67-71) 명예회장, 조완규(생물48-52) 전 모교 총장 등 70여 명이 참석한 이날 포럼에 권오현 삼성전자 상근고문이 연단에 올랐다. 2017년 삼성전자 회장을 맡아 국내 대표기업을 넘어 글로벌 최강 기업으로 일군 권오현 동문은 모교 이사장 및 모교 수익사업을 관리하는 SNU홀딩스의 초대 의장을 겸임하는 등 서울대 발전에 기여하고 있다. ‘대한민국의 리더십’을 주제로 한 이날 포럼은 주영섭(기계공학74-78) 모교 공학전문대학원 특임교수가 사회를 맡아 청중과의 질의응답 형식으로 진행됐다.
“6·25전쟁 후, 최빈국에서 오늘날의 정치적 경제적 성장을 이루기까지 ‘패스트팔로워’로서 대한민국은 인류 역사상 유례없는 대성공을 거뒀습니다. 그러나 지난 성과에 취해 자만에 빠져 ‘퍼스트무버’로 거듭나는 데 주저하고 있어요. 크게 성공한 사람의 단점이 변화를 싫어한다는 건데, 우리나라가 딱 그 모양새입니다. 여기 계신 여러분들도 대개 각 분야의 장이시지만, 솔직히 하루에 몇 시간이나 미래를 내다보는 데 쓰십니까? 눈앞의 이익을 더 중시하기 때문에 대부분 새로운 생각을 못 하실 겁니다. 조직의 장이라면 자기 시간의 절반은 미래를 생각하는 데 써야 한다고 생각해요.”
권 동문은 충분히 성숙되고 나면 개선의 여지가 확 줄어드는 효율성에 여전히 대다수 리더들의 생각이 갇혀 발전이 멈춰 있다며 “난세에 영웅이 태어난다고 하지만, 사실 영웅은 많은데 편하게 살려고 하니까 분별력을 잃는 것”이라고 꼬집었다. 이어 우리 사회에서 리더급 인사들이 존경을 못 받는 중요한 이유로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 정치권에서 흔히 회자되는 소위 ‘내로남불’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말로는 사원을 위해서라고 하지만 실상은 자기 출세를 목적으로 조직을 운영하고, 임기 내 성과를 올리는 데만 골몰한다는 것.
“좋은 리더란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으면 ‘당신은 좋은 가장이냐’고 되묻습니다. 자녀들에게 ‘주말에 놀러 가자’ 해놓고 막상 주말이 되면 ‘바쁜데 어딜 가냐’는 식으로 약속을 깨는 것도 내로남불이에요. 가난한 시절엔 먹고사는 문제만 해결해줘도 가장으로서 면을 세울 수 있었지만, 가정에서는 물론 조직에서도 요즘 젊은 세대의 생각은 다릅니다. 최빈국 출신 상사와 선진국 출신 신입사원이 함께 일하는 격이죠. 기성세대가 경제성장을 일궜다고 해서 잘못을 저지르고 양해를 요구할 권리는 없습니다. 젊은 세대가 다 옳다는 게 아니라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됐는지 이해하려는 소통의 노력이 필요해요.”
시작은 역시 가정에서부터다. 권 동문은 집안에서 제 자식하고도 대화가 안 되는데, 회사에서 남의 자식과 소통하겠다는 건 난센스라며 아주 사소한 것이라도 가정에서 내가 한 말과 행동 사이에 불일치가 없었는지 돌아보라고 조언했다. 이어 부모가 또 상사가 나쁜 의도로 말을 걸진 않을 터인데, “아버지가 귀가하면 자식들은 제 방에 들어가 안 나오고, 부하 직원은 먼저 다가오기 어렵다”고 하면서 “소통하려면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을 참고 상대방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고 말했다. 자식에겐 공부 말고 게임 얘기, 부하 직원에겐 일 얘기 말고 요즘 관심사를 화제 삼아 연습해야 한다고. 뭐든 빨리빨리 끝을 보려는 효율성 중시 문화가 압축 성장엔 도움이 됐지만, 대화나 소통의 기술을 익히는 덴 부작용을 일으켰다고 말했다.
“효율을 중시하는 건 교육도 마찬가집니다. 모범생을 키우는 현재의 교육으론 서울대를 비롯한 명문대 출신 인재의 국제적 경쟁력이 점점 더 떨어질 거예요. 틀리지 않는 기술에 특화된 그들은 새로운 도전을 하기보단 안전한 길을 가려는 경향이 강하거든요. 옛날에 서울대 들어오신 분들은 ‘공부도 잘해서 서울대 갔구나’였는데 지금 서울대 출신들은 제가 느끼기엔 ‘공부만 잘하지 리더십은 전혀 없네’입니다. 냉정하게 말해, 모교가 얌체를 키우는 조직이 되고 있어요. 리더급 인사들이 존경받지 못하는 것처럼, 서울대도 국내 최고 교육 기관이란 타이틀은 유지하겠지만, 존경도는 점점 더 떨어질 거라 봅니다.”
관악경제인회 제1회 조찬포럼은 주영섭 모교 공학전문대학원 특임교수가 사회를 맡아 권오현 동문이 청중과 질의응답하는 형식으로 진행됐다.
권 동문이 구상하는 바람직한 모교의 변화는 학교 거버넌스 체제의 대대적 정비에서 시작된다. 총장 임기 4년, 이사회 임기 2년으론 학교 운영의 일관성, 연속성, 지속성을 담보할 수 없으며 서울대의 미래에 대해 깊이 있는 고민을 하기 어렵다는 인식에서다. 지금 같은 체제에선 책임질 사람이 아무도 없게 된다고.
권 동문은 또 학교 재정의 취약성을 지적하면서 “10년 전 법인으로 나왔다는 건 나라로부터 ‘분가해 잘 살라’는 의미인데 아직도 국가보조금의 비중이 매년 늘고 있다”며 “시집 장가갔는데 계속 친정집 시가집에서 돈을 받아 쓰는 굉장히 불합리한 형국”이라고 말했다.
“저는 스탠퍼드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지방 대학이었죠. 어떻게 학교가 좋아졌느냐? 건물을 새로 지어서가 아닙니다. 재정이 튼튼해져서 좋아졌죠. 서울대도 재정이 튼튼해져야 더 좋아진다고 생각해요. 이를 위한 백업 플랜이 시급합니다. 스탠퍼드나 MIT처럼 완전히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는, 모교 교수들은 그런 창업을 해줘야 합니다. 실패할 가능성이 높아도 성공하면 크게 기여하는 그런 창업을요. 이미 있는 분야에서, 예를 들면 치킨집 같은, 같은 치킨인데 좀 더 잘 튀기는 그런 건 창업이 아니라 개업이에요. 기존 업계의 파이를 뺏는 격이라 사회에 적을 만들게 되죠. 서울대 교수들은 지양해야 합니다. 우리 동문들부터 실패에 대한 두려움을 끊어 도전하는 분위기를 조성해야지요.”
관악경제인회는 이날 참석한 동문 전원에게 권 동문의 책 ‘초격차 리더의 질문’을 증정했다.
나경태 기자
권 동문은
삼성전자 ‘반도체 신화’를 만들어낸 일등공신이자 전문 경영인으로서 삼성전자 회장까지 오른 신화적 인물이다. 변화와 혁신의 물결 속에서 전 세계가 극심한 초경쟁 사회로 진입한 최근 10여 년간 삼성전자를 초일류 기업으로 도약시킨 탁월한 리더십의 소유자로 높이 평가받는다. 1985년 스탠퍼드대 대학원에서 전기공학 박사학위 취득 후 미국 삼성반도체연구소 연구원으로 삼성에 입사, 1992년 세계 최초로 64Mb DRAM 개발에 성공함으로써 이후 삼성전자가 걷게 되는 ‘초격차 전략’의 실질적 토대를 닦았다. 2008년 반도체 사업부 총괄 사장을 거쳐 2012년 삼성전자 대표이사 부회장 겸 DS(Device Solution) 사업부문장에 올랐다. 그의 진두지휘하에 삼성전자는 2017년 인텔을 제치고 세계 반도체 1위 기업에 오르는 등 사상 최대 실적을 기록했다.
지적이면서도 끈기와 집념이 강한 원칙주의자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의전이나 불필요한 회의를 싫어하고 열린 마음으로 임직원과 대화하는 것을 즐긴다. 2017년 10월 경영 일선에서 물러난 뒤 2020년 3월까지 2년간 삼성전자의 차세대 기술을 연구하는 종합기술원 회장으로서 경영 자문과 인재 육성에 열정을 쏟았다. 현재 삼성전자 상근고문과 모교 이사장을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