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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5호 2023년 8월] 뉴스 모교소식

나가는 학생이 없어요, LnL 6개월 

기숙형대학 운영 반년 돌아보니

나가는 학생이 없어요, LnL 6개월 
 
기숙형대학 운영 반년 돌아보니

생활규칙 입주생이 직접 정하고
예체능·상담 등 비교과활동 활발
신입생 외 학년도 입주 문의 많아 



모교 기숙형 대학 LnL 입주생들이 건물 로비에 모여 토론 활동을 하는 모습. 리모델링을 통해 2학기엔 더 많은 공용 공간이 조성될 예정이다.  사진=LnL


‘2학기 LnL에 남는 자리 있나요?’ 모교 기숙형 대학(이하 RC) LnL 유불란(정치97-04)·김경미(지구과학교육06-10) 전담교수가 요즘 자주 받는 메일이다. 현재 LnL 입주생은 신입생 248명을 포함해 2학년 이상 학생 26명과 대학원생 13명. 신입생뿐 아니라 다른 학년도 LnL에 들어오고 싶다는 문의가 많다고 했다.        

올해 초 도입된 LnL이 1년의 시범 운영 중 절반을 마쳤다. 입주생들은 기숙사(관악학생생활관) 906동에 거주하며 LnL의 뜻 ‘Living and Learning’ 그대로 생활과 교육이 통합된 시간을 보냈다. 기숙형 대학을 통한 전인교육과 공동체 교육은 모교의 숙원사업이었다. 

신입생의 10% 규모로 시작했지만 큰 관심을 모았다. 올초 신입생 입주자 200여 명을 선발하는 데 1000여 명이 지원, 4:1의 경쟁률을 기록했다. 무작위 추첨으로 선발하되 남녀 비율과 단과대학 비율을 맞추고, 13개 반에 고르게 배분했다. 신입생 20여 명과 재학생 멘토 2명, 조교 역할인 대학원생 프록터 1명을 한 반으로 묶었다. 

고교 시절 대부분을 비대면으로 보낸 신입생들이 ‘잘 지낼까’ 우려도 없지 않았다. LnL에서 전해온 얘기는 고무적이다. 우선 이탈자가 없다. 반수를 위해 그만둔 학생을 제외하면, LnL에 불만족해 나간 경우가 없다는 설명. 7월 28일 방학을 맞아 학생들이 임시 퇴거한 906동에서 만난 유불란·김경미 전담교수는 “한 학기 동안 학생들이 보여준 모습은 우리도 신기할 정도”라고 했다. LnL 전담교수로 채용된 두 동문은 입주생 교육과 지도, 상담 등 실무를 맡고 있다. 

1학기 동안 LnL의 입주생들은 2학점짜리 교과 프로그램 ‘관악모둠강좌: 공동체’를 들었다. 몬테 카심 아키타국제대학 총장, 남세동 보이저엑스 대표 등 명사의 강연과 토론회가 격주로 열렸다. 비교과 프로그램도 풍성했다. 외부 강사를 초빙해 호신술, 발레, 테니스 강습과 집단 상담, 작가를 초청한 북토크 등이 진행됐다. 

여기까진 여타 대학 RC와 비슷하지만, 서울대 RC만의 색깔이 드러나는 부분이 있다. RC를 도입하며 모교는 “진정한 자치 공동체를 만들어 보자”는 기조를 세웠다. 규율과 벌점 위주의 하향식 관리가 아닌 학생 주도의 상향식 자치가 실현되고 있다는 것이다.

운영진이 주문한 것은 한 가지였다. ‘우리가 함께 살기 위해 무엇이 필요할지 생각해 보자’는 것이었다. 그러자 입주생들은 몇 달간 설문조사와 토론을 거듭하며 의견을 모았다. 치열한 조율 끝에 어느날 전원이 한 공간에 모였다. 일명 ‘대토론의 밤’. LnL의 공동생활에 필요한 규정들이 이날 탄생했다. 운영진은 간단한 피드백만 줬을 뿐이다. “대토론회 주요 논점 중 하나가 공용 세탁실 사용이었습니다. 많은 기숙사에서 남녀 층을 나누고 출입 시간도 정하지만 LnL은 같은 층에 살고 있거든요. 그래도 공용 세탁실은 요일이나 날짜를 나눠 쓰게 해야 하나, 운영진은 걱정했죠. 정작 학생들은 ‘규칙은 필요 없다. 얼마든지 자율적으로 쓸 수 있다’는 결론을 내리더군요. ‘남의 속옷에 손대는 게 불편하다’는 일부 의견도 존중하고 수렴하면서요. 지금까지 문제 없이 잘 돌아가고 있습니다.”(유불란)

입주생 전체가 모인 단톡방에는 ‘빨래 빨리 가져가 주세요’, ‘밤늦게 대화 자제해 주세요’ 같은 의견이 수시로 제기되지만 대체로 원만하게 해결된다. 처음엔 ‘이거 해도 돼요’ 허락을 구하던 학생들은 시간이 가면서 ‘이렇게 해보고 싶다’, ‘해보겠다’며 능동적으로 바뀌어갔다. “선제적으로 갈등을 예방하려는 접근 방식을 버렸더니, 학생들 스스로 충분히 갈등을 해결하고 조정할 수 있음을 확인했다”는 설명이다.   
 

LnL 입주생들은 학기 중 열린 '한마음 체육대회'처럼 스포츠 활동을 통해서 한층 더 친밀해졌다. 사진=LnL 


아무리 바빠도 입주생들은 수요일 밤만은 LnL 활동을 위해 빼둔다. 김경미 전담교수는 “누가 시키지 않았는데도 수시로 반끼리 한강이며 야구장으로 놀러가는 일은 너무 많아 일일이 확인이 안 될 정도”라며, “저도 기숙사에 20년 가까이 살았지만 옆방에 누가 사는지 몰랐는데, LnL에선 시작부터 섞이고 부딪히며 공동체 만들기를 맛보니까 이젠 학생들이 ‘반을 섞어달라’는 등 확장을 원한다”고 했다. “한 반은 어제 부동산에 다녀왔어요. 내년에 LnL을 나가면 건물을 빌려서 계속 같이 살고 싶다고요. 저희도 진지하게 들어주고 학교와 논의 했죠. 학생이라 잘 안 믿어준다며 위임장을 써달라고 해서 만들어줬더니, 부동산 다섯 곳에 들러 건물까지 보고 오더라고요. 다른 교수님들께 이 말씀을 드리면 ‘그게 된다고요?’ 하면서 눈빛이 달라지세요(웃음).” 기숙사를 얻으려고 신청했다가, 졸업할 때까지 살고 싶어졌다는 학생도 적지 않다.

멘토와 조교로 입주한 재학생들도 ‘24시간 돌봄’이라 할 만큼 헌신적이다. 박찬무(경영13-20·경영학과 석사과정) 씨는 “작년 LnL 신규 사업에 대한 소식을 듣고 학교 커뮤니티에 기여하고 싶다는 생각에 LnL 프록터에 지원했다"고 했다. "한 학기 동안 프록터로서 ‘학생 주도로 만들어나가는 LnL’을 추구하며 동료들과 열심히 고민하고 다양한 이벤트를 기획했다. 신규 사업이라 시행착오도 겪었지만 학생들의 적극적인 참여 의지를 가진 학생들 덕분에 동기부여가 되었고, 그 과정 자체에서 보람을 느낄 수 있었다”고 말한 그는 "학생들과 함께 성장해나가는 장을 마련하기 위해 방학중에도 열심히 준비하고 있다. 앞으로의 LnL이 더욱 기대된다"고 말했다. 처음엔 신입생들이 새벽에 아프다며 방문을 두드리는 등 체계가 잡히지 않아 조교들이 고생했지만, 이 또한 당직 체계가 생기고 신입생들도 자연스럽게 배려를 익히면서 나아졌다. 운영진과 대학원생 조교들은 방학 중에도 매주 회의를 열고 LnL 운영을 논의하고 있다. 

모교는 2026년까지 기숙사 여러 동을 재건축해 신입생 전원 대상으로 LnL을 확대할 계획이다. 현재는 906동만 개보수해 시범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8층 건물로 한 층에 두 반씩 기존 2인실을 주거 공간으로 쓰고, 일부 방의 침대와 가구를 들어내 소모임 공간으로 쓴다. 아쉬운 것은 공용 공간. 200여 입주생 전체가 모이려면 강당이 있는 건물로 이동해야 했고, 20여 명 모일 곳도 없어 로비에 책걸상을 놓았다. 방학 동안 여러 개의 방을 트고 이동식 벽을 설치하는 리모델링이 진행 중이다. 요리와 베이킹을 할 수 있는 공유 주방도 곧 설치된다.

싱가포르대에선 RC 거주생들이 같은 공간에서 아침과 저녁을 먹으며 대화를 나눈다. 현재 LnL 건물 내에는 식당이 없다. 향후 RC 규모를 확대할 때 고려해볼 부분이다. 유불란 전담교수는 “한 방향을 보는 강당보다 고대 원형극장처럼 소통하기 좋은 형태의 아고라가 생겼으면 한다. 다양하게 만날 수 있는 공간이 생겼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전했다.    

한 학기 동안 서로 어울리며 친해진 입주생들은 2학기 교과목 ‘학생설계세미나’를 통해 팀을 꾸리고 프로젝트 활동을 펼칠 예정이다. 벌써 사회과학도와 이공계생이 실험을 해보겠다거나, ‘못난이 과일을 대량 구매해서 과일 섭취가 어려운 기숙사에 제공하겠다’는 등 각양각색 팀이 꾸려졌다. 

유홍림 총장은 “장기적으로 학부대학과 LnL의 결합을 구상하고 있다”고 밝혔다. 소통과 공감능력, 세계시민성 등을 함양한다는 계획이다. 어쩌면 동창회가 추구하는 서울대인의 화합도 LnL에서 싹틀 수 있지 않을까. “서울대생이 모래알같다지만 여기 와서 생각이 달라졌어요. 수많은 ‘하지 말라’ 속에 있다 보면 뭉쳐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내 일만 잘하면 되니까요. 뭔가를 같이 하는 게 재밌고, 의의가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 학생들은 자연스럽게 뭉칩니다. 이런 시도가 늘어나면 서울대 전체의 색깔이 바뀌지 않을까 기대해요.”(유불란)

박수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