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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4호 2023년 7월] 뉴스 모교소식

“북한 농업증진에 바친 30여 년, 이젠 여러분이…”


“북한 농업증진에 바친 30여 년, 이젠 여러분이…”




북에 이모작 전파 김필주 동문
지난해 모교 사회봉사상 수상

대북농업지원의 대모로 불리는 김필주(농학56-60) 동문이 6월 22일 모교 글로벌사회공헌단 사회공헌아카데미를 통해 후배들을 만났다. 재미 농학자인 그는 1989년부터 100회 넘게 북한을 방문해 이모작을 전파하고 목화 재배를 진작시키며 북한의 농업 생산력을 비약적으로 끌어올렸다. 지구촌 농업협력 및 식량나누기 운동 본부 ASii(Agglobe Services International)를 설립하고, 평양과학기술대 농대 학장을 맡아 북한 농업 인재 양성에 기여했다. 그 공로로 지난해 모교 사회봉사상을 받았다. 이날 줌을 통해 열린 온라인 강연에서 그는 “남북이 갈라지기 전 살았던 마지막 세대로서, 내가 가진 것을 마지막까지 어떻게든 여러분과 나누고 싶다”고 말했다.

“6·25 때 피난간 곳에서 한글을 못 읽는 아이들을 만났어요. ‘상록수’의 채영신이 되어보자 해서 농대에 진학했죠. 졸업 후 농촌지도원이 됐지만 나라가 가난해 비료 한 줌, 종자 한 톨 줄 수 없었어요. 가만히 생각하니 배우는 수밖에 없겠더군요. 미시시피주립대에서 장학금을 받게 돼 돈 100달러와 가방 하나 들고 용감하게 미국에 갔어요.”

코넬대에서 종자학 박사학위까지 받은 그는 세계적인 옥수수 종자기업 ‘파이어니어 하이브레드 인터내셔널’에서 일했다. 전 세계를 다니면서 개발도상국에서 종자 생산을 돕고, 선진국에서 판매하는 일을 맡았다. 그러다 우연히 만난 재미 목사가 ‘북한의 종자 보급을 도와달라’는 제안을 해왔다. 회사에서도 흔쾌히 지원해 1989년 북한을 처음 방문하게 된다.

“그땐 미국에서 홍콩으로 가서 중국 가는 비자를 받고, 다시 북경에서 북한 가는 비자를 받아야 했어요. 북한 대사관 문간에 아침 8시에 갔는데 못 들어가겠더군요. 다시 못 나올 수도 있다는 생각에요. 결국 마지막 시간에 어쩔 수 없이 들어가니까 ‘김필주 선생 와 인제 왔습네까? 한참 기다렸습네다. 남성인 줄 알았더니 여성이로구만요’ 하더군요. 비행기를 타고 평양에 내리니까 한 청년이 환하게 웃으면서 반겨줘요. 내 동족이란 생각이 들어 마음이 편해졌죠.”

동물학을 전공한 남편과 함께 두려움과 호기심 속에 밟은 북한 땅에서 축산과 종자 생산에 대한 뜨거운 관심을 느낄 수 있었다. “반공 교육 철저히 받은 세대잖아요. 고민이 컸지만 우리가 농민을 돕기 위해 공부했고, 남쪽은 도움이 필요 없을 만큼 발전했으니 한번 하는 데까지 해보자 싶었어요.” 그해 가을 다시 북한을 찾았고,협동 농장 여러 곳을 임대받아 운영하며 본격적으로 농업 지원 활동을 펼쳤다.

남한과 달리 북한은 수작업으로 일하고 저장 시스템도 발달하지 않았다. 생산량 400여 만톤 중 손실량이 100만톤에 달하니 늘 가용 식량이 모자랄 수밖에 없다. 그가 이끄는 ASii는 △옥수수 종자 및 우수한 젖소 정액 협력 △보리와 밀을 이용한 이모작 협력사업 △협동농장 염소 및 젖소 개량사업 △황해도 목화농장사업 협력 △북한농업 인재 지도 등으로 타개해 왔다. 북한은 조생종이 없어 봄보리를 심을 수 없었는데, 미국에서 종자 1000톤을 가져와 시험한 결과 대성공을 거둬 이모작을 정착시킬 수 있었다. 2002년에는 목화 재배에도 성공했다.

“첫해에 비료를 많이 갖다 줬어요. 제 키보다 더 크게 자라서 목화송이가 잔뜩 달렸는데 터지질 않는 거예요. 다음 해에 비료를 하나도 안 줬더니 목화 12톤이 나오고요. 그곳 사람들이 그제야 절 보고 그래요. 비료는 한 정보(3000평)에 300kg만 주고, 종자는 2만에서 3만주 심으라고 했는데 ‘미국에서 온 박사 선생이 뭘 알겠느냐, 우리 식으로 해보자’ 해서 8만주씩 심고 비료를 막 줬다고요. 자신들이 잘못했다고, 그 다음부턴 팥으로 메주를 쑨대도 듣더라고요.” 북한의 농업 전문가와 기술자들을 미국에 초대해 농업 견학을 시킨 것, 북한 농민을 중국에서 수련시켜 보낸 일도 성공적이었다고 돌아봤다.

그는 북한의 대규모 축산기지인 ‘세포등판축산기지’에서 통일농업의 희망을 봤다. 남쪽의 개량된 한우 정액을 가지고, 북쪽의 5만 정보(약 1억5000만평) 크기 목장에서 번식시켜 기르면 세계 시장을 개척할 수 있다는 꿈이다. “북쪽 사람들은 잘살아 보겠다는 의지와 욕망이 있고, 남쪽 청년들은 나눌 수 있는 마음의 준비가 됐죠. 그러니 우리가 같이 힘을 합하면 얼마나 많은 일을 할 수 있을까요. 교류하고 협력하면 남북 간에 공동 먹거리를 생산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기후 변화와 천재지변이 잦은 만큼 식량 자급자족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어요. 통일의 밑받침으로도 써야죠. 지금 형편 같아선 아무것도 안 될 것 같지만, 사람 사는 데는 모르는 일이니까, 기대해보는 거죠.”

팬데믹과 남북관계 경색으로 북한 지원의 문이 닫힌 상황이지만 김 동문은 자신의 성과가 언젠가 남북 협력이 닻을 내리는 거점이 되길 바라고 있다. 북한 천덕리 농촌시범마을 조성도 김 동문의 농업지원사업이 마중물이 됐다. 강연을 들은 후배들에게 간곡한 부탁을 남겼다. “아무리 거부해도 남북은 숙명적으로 함께 가야 하는 동족입니다. 동정이 아닌 나눔의 정신이 필요해요. 이제 저는 몇 년 남지 않았지만 여러분들은 여건도 되고, 마음도 있지요. 평화공존과 남북 공동 번영은 여러분들의 몫입니다.”

박수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