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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3호 2023년 6월] 뉴스 본회소식

“주변에서 중심으로 부상한 한국, 새 국가 정체성 정립할 때”

손인주 모교 정치외교학부 교수

“주변에서 중심으로 부상한 한국, 새 국가 정체성 정립할 때”

손인주 (동양사학91-98)
모교 정치외교학부 교수




국민 합의 이끌어낼 서사 필요
‘동심원적 다자주의’ 제안도


“한국은 주변이 아니라 중심으로 부상했습니다. 더이상 약소국, 중견국이 아니에요. 국력에 맞는 새로운 국가 정체성을 기반으로 국가 전략을 짜야 할 시점에 직면했습니다.”

‘우리는 누구이며, 한국은 어떤 나라가 돼야 하는가’. 5월 24일 마포구 본회 장학빌딩에서 열린 수요특강에서 손인주 모교 정치외교학부 교수가 던진 질문이다. 조지워싱턴대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은 손 교수는 홍콩대 국제정치학 교수를 지내다가 2017년 모교에 부임해 중국정치외교와 동아시아 비교정치 등을 연구하고 있다. 모교 국가미래전략원 부원장이자, 미중 갈등을 포함한 세계 질서 재편과 국가 전략을 연구하는 ‘글로벌 한국의 비전과 전략’ 클러스터 장이다.

우리는 여전히 스스로를 ‘강대국 사이에 낀 약소국’으로 평가절하하지만, 1인당 GDP, 군사력, 문화력 등 객관적인 지표는 위상이 달라졌음을 가리킨다. 손 교수는 “그런데도 우리는 이를 잘 인지하지 못한다. 특히 정책 결정자들은 변화된 위상을 어떻게 활용할지 장기적이고 깊이 있는 고민이 상대적으로 적었다”고 문제를 제기했다.

“물질적인 국력(power)도 굉장히 중요하지만, 동시에 비물질적이고, 정신적인 정체성(identity)이 국력과 상호작용 하면서 국익이 변화하게 됩니다.” 정체성이 국력에 영향을 끼친 사례로 1991년 붕괴된 소련을 들었다. “공산주의라는 정체성은 소련인이 국력을 키우고, 국가 체제를 수호하려 노력하는 동력이 됐습니다. 그런데 1980년 들어서 ‘굳이 공산주의 체제 정책을 지켜야 할까’라는 의문이 생겼죠. 당시 소련을 지켜낼 수 있는 군사력이 있었고, 가지고 있는 레버리지가 분명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사용하지 않고 결국 붕괴했습니다. 소련인들이 공유하는 올바른, 통일된 정체성이 없었기 때문에 국력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한 거예요.”

이제 한국은 세계질서를 만드는 데 적극 기여해야 한다는 요구를 한몸에 받고 있다. 국가 정체성과 비전에 대한 국민의 합의가 없다면 장기적인 외교 전략 수립도 불가능하다고 그는 역설했다. “우리는 누구인가. 어떻게 살아왔고, 앞으로 30년, 50년 후 어떤 정치적 공동체를 만들어 다음 세대에 물려줄 것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손 교수는 “국가미래전략원에서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서사를 기반으로 국가 정체성에 대한 합의를 이끌어내기 위해 토론을 거듭하고 있다”고 했다. 이와 별개로 그가 ‘미래 한국의 정체성을 구성할 원칙’으로 생각해본 것은 대한민국 헌법에서 내세우는 ‘자유 민주주의’와 유엔헌장이 함의한 ‘세계주의’다.

“100% 합의란 없지만 대한민국 헌법을 부정하는 사람은 소수인 것 같아요. 헌법을 관통하는 ‘자유’는 존엄한 개개인을 존중하는 도덕적 가치일 뿐 아니라 국력의 원천이고, 장기적인 국익에 기여합니다. 미래 한국에선 국가뿐만 아니라 민간의 역할이 클 거예요. 다양성과 혁신성을 존중하고, 정부 주도가 아닌 사회적 역동성, 민간 혁신성을 극대화해 자강의 길을 가야 합니다.” 세계주의를 기치로 개방적인 네트워크 국가를 국가 정체성으로 정립해야 한다고도 말했다. “한국은 유엔의 도움을 받으며 보편적 가치를 받아들인 적이 있고, 미래 세대 또한 유엔이 주도하는 글로벌 거버넌스에 대한 공감대가 큽니다.”

그는 쉽지 않은 국제공조의 실마리를 풀어갈 해법으로 ‘동심원적 다자주의’ 모델을 제시했다. 동심원 위에 군사력, 경제력 등 ‘파워’를 한 축, ‘수렴성’, 즉 원칙과 가치 등 정체성을 또 다른 한 축으로 긋고 중심부터 가장자리까지 국제사회를 재배열한 모델이다. 가령 미국은 국력 면에서 우리에게 중대한 영향을 미치고, 자유민주주의 체제 하의 원칙들도 다수 공유하므로 동심원의 핵심에 가깝다. 양자관계를 권장하는 나라다. 상대적으로 중심에서 먼 아프리카나 중동은 다자주의가 효과적이다. “중국이 참 묘한 위치입니다. 군사·경제적으로 우리에게 큰 손해를 끼칠 수도, 이익을 줄 수도 있죠. 첨단 기술, 문화 등 소프트파워는 협력이 쉽지 않고요. UN의 주권 개념, 대량 살상무기 사용 원칙 등은 공유하면서, 항해의 자유나 자유민주주의, 인권은 10년 사이 점점 거리가 멀어지고 있어요.”

그는 “외교 전략을 만들고, 실행하는 데는 가지 않았던 불확실한 길을 가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우리 국민에게 용기가 필요하다”고 강조하며 강의를 끝맺었다. 질의 응답 시간에 한 동문이 분열된 국론을 주제로 질문하자 곰곰이 생각한 끝에 답했다. “지금까지 우리나라 정체성의 가장 지배적 담론은 ‘반(反)’이었습니다. 반봉건, 반외세, 반군사, 반독재…. 근대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죠. 그런데 이제 ‘반’으로 시작하는 정체성이 가진 유용성은 많이 떨어졌습니다. 특히 제가 학교에서 보는 미래 세대들, 더이상 ‘반’을 얘기하지도, 듣지도 않아요. 새로운 정체성이 필요합니다. 많은 국민이 공감할 수 있는 국가 정체성을 만들게 된다면, 여러 역사 이슈에 대한 해석도 포용할 여지가 커질 겁니다.”

손 교수의 말엔 내내 강한 사명감이 내비쳤다. “여러 번 기회가 있었지만 한국에 오길 망설였습니다. 현 총장이신 유홍림 교수님께서 나라를 걱정하시며 커져 가는 미국과 중국 문제에 대해 교육하고 연구할 필요가 있다고 설득하셨어요. 돌이켜보니 서울대에서 국민의 세금으로 혜택을 누렸기에, 빚을 갚겠다는 생각으로 돌아왔습니다.” 소액 기부 등을 통해 우리 국민들이 국가미래전략원을 같이 키우고, 성과를 공유하는 기관으로 자리 잡길 바란다는 바람도 밝혔다. 이날 참석자들에게 국가미래전략원보고서 ‘한국이 당면한 지정경 리스크’ 인쇄본을 증정했다.

박수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