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2호 2023년 5월] 문화 나의 취미
“25년 수집 결실 될 미술관, 지지해 준 아내에게 헌정합니다”
“25년 수집 결실 될 미술관, 지지해 준 아내에게 헌정합니다”
고미술 수집가 황경식(철학66-70)
모교 철학과 명예교수
오원·겸재 등 희귀 서화 소장
난임 명의 아내 위해 모자상 모아
“반세기 동안 고미술품 수집에 몰두할 수 있었던 건 모두 아내 덕이었습니다. 이제 미술관을 지어 아내에게 헌정하려 합니다.”
황경식 모교 철학과 명예교수는 롤스의 ‘정의론’을 국내 최초로 번역한 윤리철학의 대가다. 그에게는 오랜 꿈이 있다. 그동안 모은 고미술품 1000여 점을 집대성할 미술관을 짓는 일이다. 미리 지어둔 이름은 ‘여천(如泉) 미술관’. 자신의 호 ‘수덕(修德)’이 아닌, 아내 강명자(HPM 3기) 꽃마을한방병원 원장의 호에서 따왔다. 25년간 수집 편력이 “철학자로선 ‘외도’지만, 남편으로선 ‘외조’였다”는 황 동문을 4월 26일 그가 이사장을 맡은 서초동 꽃마을한방병원 집무실에서 만났다.
“동양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로 진·선·미를 꼽습니다. 진리 탐구인 철학을 50년간 했으니 진(眞)을 탐구한 셈이죠. 철학 중에서도 제가 공부한 윤리학, 즉 도덕철학은 ‘선(善)이란 무엇이냐’가 핵심이고요. 문득 내가 ‘미’를 모르고 살았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평생 ‘진리는 무엇이고, 선함은 무엇인가’를 궁구했듯 ‘아름다움이 뭔지’도 알고 싶었다. 추상화 중심의 현대미술보다 구상화 중심의 고미술에서 답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국립중앙박물관의 고미술 강좌를 주2회 5년 꼬박 듣고 고미술 연수회도 쫓아다녔다.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의 책들을 읽는데 가슴 깊숙이 ‘알면 사랑하게 되고, 사랑하면 모으게 된다’는 말이 들어오더군요. 조선 최고의 서화 수집가 석농 김광국의 말이 원조예요. 처음부터 미술관을 짓겠다는 목표로 수집을 시작했죠.”
집요한 수집 여정을 여러 모로 지지한 이가 아내 강명자 동문이다. 아내는 언제나 그의 자랑이었다. 1966년 경희대 한의대에 홍일점으로 입학했고, 여성 최초로 한의학 박사학위도 땄다. 난임 한방치료 명의로 승승장구하며 20여 년간 임신에 성공하게 해 준 가정이 1만5000례. 별명이 서초동 삼신할미다. “환자 시부모가 찾아와 큰절하며 ‘삼신할미가 따로 있나, 당신이 삼신할미지’ 해서 그렇게 됐죠. 허 준은 책을 써서 만대에 알려졌는데, 수많은 가정에 빛을 준 우리 아내는 누가 기억할까 싶더군요. 그 업적을 남길 징표를 찾고 싶었어요.”
좋아하는 회화, 자수, 서예 등을 모으는 동시에 각 나라와 종교의 모자(母子)상을 구하기 시작했다. 아이를 안은 어머니 형상의 자애로움이 아내가 베푼 의술을 닮아서일까. 한국의 삼신할미처럼 가톨릭의 성모자상, 중국 송자관음상, 일본 마리아관음상 등 각국 종교에서 임신, 출산, 양육을 축원하는 형상들엔 남다른 매력도 있었다. ‘수집가 남편 잘 좀 봐달라’는 애교 수준을 넘어 ‘삼신할미’ 테마로만 따로 박물관을 만들 수 있을 만큼 진심이었다.
“삼신할미가 있는 한국에서 송자관음보살상은 드물어요. 중국 전역에서 80종을 수집했죠. 한때는 일본의 마리아관음을 찾는 데 몰두했습니다. 가톨릭의 마리아, 불교의 관음이 습합(習合)된 것인데 보기엔 송자관음과 똑같아요. 400년 전 나가사키에 가톨릭이 전파됐을 때, 박해가 심해 관음보살을 놓고 마리아라고 하면서 모셨기 때문이죠. 당대 사람들의 마음속에서만 보이는 것이니 찾기 힘들죠. 일부러 종교 화합을 하려 해도 어려운데, 모성으로 두 종교를 아우르는 상징이 존재했고 신도도 있었다는 게 놀라워요.”
인터뷰를 하는 내내 벽 너머에서 요란한 공사 소리가 들렸지만 그는 거슬리기는커녕 흐뭇해 보였다. “미술관을 짓기 전, 첫걸음으로 조그만 갤러리를 만들어 5월에 오픈한다”고 했다. “‘여천미술관’은 조선시대와 중국, 일본 전통미술이 함께하는 곳으로, 부속 박물관은 ‘삼신할미 박물관’이 될 겁니다. 녹록지 않겠지만 이 갤러리가 출발점이 될 거예요.”
이어 안내한 여천갤러리엔 정선의 ‘선면송석도’, 심사정의 ‘송하한담도’, 장승업의 ‘노안도’ 등 힘들게 구했다는 ‘3원 3재’의 작품은 물론 수집가의 개성이 묻은 소장품이 알차게 들어찼다. 초입에 걸린 한 여인의 초상화는 사뭇 느낌이 오묘했다. 덕혜옹주를 그린 것으로 추정하는 유화 작품이다. “10년 전쯤 도쿄 근교에서 큐레이터가 전화를 해왔어요. 팔순의 소장자가 조선 왕족의 딸을 그린 초상화로 알고 50년간 보관해왔다는데 덕혜옹주와 너무 비슷하다면서요. 보니까 옹주의 고교 시절 사진 그대로예요. 옹주의 일본인 남편이 시인이자 화가였죠. 실력을 보아 직접 그린 것 같진 않고, 헤어진 옹주가 그리워 다른 화가에게 부탁해 사진을 보고 그린 게 아닐까 추측했습니다. 여기저기 수소문하고 남편이 재혼해 얻은 둘째 아들에까지 연락했는데 긍정도 부정도 않더군요. 꼭 진실을 알고 싶은 작품이에요.”
근대 작품도 몇 점 가지고 있다. 김환기의 경우 도기에 추상화를 그린 작품을 소장 중이고, 서울의 한 호텔 로비에 걸려 있던 것을 입수한 가로 6m, 세로 3m의 유화 장생도도 김환기의 화풍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중섭의 스승인 임용련의 그림 ‘십자가의 상’은 자주 대여해주던 국립현대미술관의 간절한 부탁을 받고 떠나보낸 작품이다. 집무실에 한호 한석봉과 추사의 글씨를 걸어놓고 요즘도 글씨 보는 안목을 키우려 한문을 배운다.
그의 고아한 컬렉션은 끊임없이 덕을 닦는 ‘수덕’ 남편과 샘물처럼 부지런한 ‘여천’ 아내가 함께 가꿔온 삶과 닮아 있다. 30여 년 전 부부는 사재 100억원을 출연해 공익의료법인인 ‘명경의료재단’을 설립하고 국가에 환원했다. 평생 가르쳐온 정의를 실천하겠다는 황 동문의 뜻이 발단이었다. “또 한 번 재산을 사회에 출연해 ‘꽃마을 문화재단’을 만들어 보려 해요. 미술관과 박물관을 지어 의료재단에서 못다한 문화사업도 하고, 장학사업도 할 겁니다. 주변 사람에게 도움이 되려 노력했던 부부로 이해되고 싶은 마음입니다.”
철학과 윤리 주제로 다수의 책을 낸 그는 최근 고미술 책만 내리 썼다. 3월 출간한 ‘미술관 옆 박물관’은 가려 뽑은 소장품과 촌평을 더해 앞으로 지을 미술관을 기대하게 만든다. 여천갤러리는 꽃마을한방병원 5층에 있다.
황경식 동문이 고미술을 주제로 낸 신간 '미술관 옆 박물관'.
박수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