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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8호 2023년 1월] 뉴스 모교소식

오세정 총장 신년사 “지성의 빈곤이 불러온 난세, 지성인의 역할 중요”

“지성의 빈곤이 불러온 난세, 지성인의 역할 중요”


오세정 모교 총장 


한 해를 보내며 늘 상투적으로 ‘다사다난(多事多難)했던 한 해’라는 표현을 씁니다만, 지난 2022년은 그야말로 이 말이 절실히 와닿는 시기였습니다. 새로운 정부가 출범했지만 우리 사회는 아직 선거가 끝나지 않은 듯이 반목, 대립하며 좀처럼 통합의 기미를 보이지 못하고 있습니다. 경제도 전에 보지 못한 조짐들이 여럿 나타나고 있어 금년이 매우 힘든 한 해가 되리라는 전망이 적지 않습니다. 또 얼마 전에는 다시 떠올리기에도 가슴이 미어지는 젊은이들의 안타까운 희생도 있었습니다. 

국제적으로는 설마 했던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이 벌어져 가뜩이나 어려운 세계경제에 큰 부담을 주고 있고, 가까운 중국에서는 시진핑 주석이 3연임에 성공했지만 국제사회가 이를 마냥 축하해 주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소위 선진국들의 사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게 정말 우리들이 해방 후 70년 넘게 따라 배우고자 했던 나라들이 맞나 싶을 정도로 비민주적, 비지성적인 현상들이 가득합니다. 극심한 빈부갈등, 정치적 진영대립, 가짜뉴스의 난무 등으로 인해 새해를 맞는 기분이 희망적이지만은 않습니다. 옛 사람들이 말한 ‘난세(亂世)’란 아마도 이런 것일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서울대 구성원 여러분! 과거의 난세는 일부 권력자들의 야심이나 지나친 행동 등이 주요 원인이었다면, 지금의 난세는 ‘지성의 빈곤’, ‘지성의 타락’이 그 배경에 도사리고 있다면 지나친 얘기일까요? 교육받고 정보를 가진 거대한 대중이 공론장에 참여하고 있지만, 사람들은 현실과 미래를 책임질 수 있는 정확한 지식·정보보다는 자기가 듣고 싶은 말, 자기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만을 들으려 합니다. 

위에서 언급한 정치적 진영대립, 가짜뉴스의 난무 같은 문제들은 바로 여기서 발생하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많은 지식인들이 이런 흐름에 영합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멀쩡했던 지식인들이 ‘오디언스(audience)’에 영합하여 곡학아세(曲學阿世)의 궤변을 늘어놓는 일이 흔한 일이 된 지 오래입니다. 이들이 양 진영의 유력 ‘스피커(speaker)’가 되어 우리 사회를 타락시키고 분열시키는 일이 더 이상 묵과하기 힘든 지경에까지 이르렀습니다. 

한 사회에 지성인이 왜 필요하겠습니까? 지성인을 양성하기까지는 사회적으로 많은 자원이 필요합니다. 그러기에 지성인은 양쪽 진영에서 비난 받는 일이 있더라도, 객관적인 분석을 통해 장기적으로 우리 사회에 필요한 비전을 제시하고 설득하는 역할을 해야 할 것입니다. 미리 답을 정해 놓고 거기에 맞는 사실만을 취사선택하여 왜곡된 주장을 전파하려는 모든 시도들에 대해 맞서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다른 이유가 아니라 ‘지성의 빈곤’, ‘지성의 타락’이 현 난세의 원인이라는 것은 거꾸로 지성인이 제대로 된 역할을 하기만 한다면 이를 극복할 수 있다는 얘기이기도 합니다. 반지성주의가 난무하고 지식인의 사회적 역할이 의심받는 지금이야말로, 서울대인들의 진가를 발휘해야 하는 때일 것입니다. 우리 사회는, 그리고 우리 국민은 지난 70여 년간 누가 뭐래도 서울대를 믿어주고 자랑스럽게 여겨주고, 묵묵히 뒷바라지 해 왔습니다. 그리고 어려운 문제가 생기거나 위기가 닥쳤을 때 서울대를 바라보아 온 것도 사실입니다. 그 믿음과 성원에 서울대가 얼마나 잘 부응했는가는 반성해야 할 점도 있겠습니다만, 우리 사회가 여러 가지 문제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지금 이 시점이야말로 서울대와 우리 사회 ‘지성’의 존재 의의를 증명해야 하는 때라고 생각합니다. 

세상은 초단기적으로 변화하고 있습니다. 그 변화의 속도는 너무 빠르고 그 성취의 정도는 너무 대단해 눈이 부시기도 하지만, 그 눈부심 속에 혹 우리가 놓치고 있는 부분은 없는지, 도대체 이 변화의 방향은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하는 불안감이 적지 않은 것도 사실입니다. 대학은, 특히 서울대는 근시안으로 숨가쁜 변화를 따라갈 것이 아니라, 긴 안목으로 우리 미래의 조감도와 발전 방향을 제시해야 할 것입니다. 이를 해내기 위해서는 대학 스스로가 긴 호흡을 갖고, 한 단계 도약할 수 있는 태세를 갖추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에 우리 서울대는 오랫동안 ‘중장기발전계획’을 준비해 왔고, 드디어 작년에 채택하였습니다. 저는 이제 곧 임기를 마치지만, 금년 2월 새로 들어설 집행부는 이 계획에 따라 차근차근, 또 과감하게 서울대의 변화를 이끌어줄 것입니다. 저는 새 집행부가 최적의 환경에서 곧바로 일을 시작할 수 있도록 원활한 업무인계에 만전을 기하겠습니다. 

친애하는 서울대인 여러분! 이제 해방 후 80년이 될 날도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그동안 우리나라와 서울대는 숱한 어려움 속에서도 엄청난 성취를 이뤄왔습니다. 최근 월드컵 16강의 쾌거를 이뤄낸 축구 대표 팀 선수들의 세리머니 문구 중에 ‘중요한 것은 꺾이지 않는 마음’이라는 말이 눈에 띄었습니다. 올 한 해는 분명히 만만치 않은 시간이 되겠지만, 지난 80년 가까이 거센 파도에도 꺾이지 않았듯이, 우리의 힘을, 지성의 힘을 믿고 꿋꿋이 나아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