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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2호 2022년 7월] 오피니언 동문칼럼

쉽게 판단하는 사회

오  준 세이브더칠드런 이사장, 전 유엔 대사
동문칼럼
 
쉽게 판단하는 사회



오  준 
불문74-78
세이브더칠드런 이사장
전 유엔대사
 
성급한 판단이 분열·갈등 키워
인권 의식 기초로 마음 열어야
 
영어에 ‘judgmental society’라는 표현이 있다. 우리말로 정확히 번역하기 어려운 표현 중의 하나인데, ‘쉽게 판단하는 사회’ 정도일 것 같다. 어디선가는 ‘이래라저래라 하는 사회’라는 번역도 본 적이 있다. 말하자면, 다른 사람의 외모, 경제력을 놓고 ‘예쁘다, 잘 산다’ 같은 판단 내리기를 넘어서, 아이들은 시끄러우니까 입장시키지 않겠다는 식으로 선입견을 갖고 ‘이래라저래라’ 한다는 뜻이다. 

어떤 사회이든 공동의 가치가 있고, 그것을 개인에게 강제하는 것도 사실이다. 특히 인간이 만든 모든 조직 단위 중 가장 강력한 권한을 가진 국가는 매우 효과적으로 그렇게 할 수 있다. 과거에는 공동의 가치를 정하고 강요하는 것이 국가, 부족, 또는 종교 지도자의 몫이었다. 사회의 다른 구성원들은 판정의 대상이지 스스로 남을 판정하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민주주의가 확산되고 소통과 통신 수단이 발달하면서 사회 전체가 판단지향적(judgmental)으로 되고 있는 것 같다. 200년 전 전라도 남원에 미인이 있다고 소문이 나면 실제로 보지 못한 많은 사람들은 판단할 근거가 없었을 테지만, 오늘날에는 사진을 신속히 공유하면서 누구나 나름의 평가를 할 수 있다. 과거에는 권력자가 그녀를 미인이라고 했으면 일반인은 이견을 제시하기 어려웠겠지만, 민주사회에서는 누구든 한 마디씩 할 수 있다. 

사회 전체적으로 과거보다 쉽게 판단하는 경향은 세계 공통인 것 같다. 특히 사회적으로 대립적인 문제에 있어서 더욱 그렇다. 최근 미국에서 낙태에 관한 대법원 판결이 바뀌면서 큰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이 좋은 예다. 여러 가지 요소를 고려해야 하는 복잡한 문제임에도 미국인들은 보수 또는 진보 성향에 따라 쉽게 한 쪽 의견에 동조하고 투쟁하는 모습이 보인다. 그런데, 필자의 과거 외국 근무 경험에 비춰 볼 때, 이러한 현상은 우리나라에서 더욱 두드러지는 것 같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궁금한 분들은 인터넷 상의 수많은 댓글들을 잠깐만 읽어 보면 알 수 있다. 

우리가 쉽게 판단하는 사회를 갖게 된 것은 진지한 분석이 필요한 연구 대상이겠지만, 상식적으로 생각해 볼 수 있는 이유들도 있다. 우리는 발달된 IT 기술 덕분에 어느 나라보다도 많은 국민이 인터넷에 노출되어 있다. 다른 사람들의 외모, 능력, 행실에 관한 정보와 평가가 넘쳐 난다. 또한 정치적 성향, 출신 지역이나 학교에 따른 사회적 분열과 대립도 강하다. 불행히도 서로 다른 그룹 간의 비난과 낙인찍기가 다반사다. 상대방의 이야기를 들어보고 동의하지 않는 부분에 대하여 문제를 제기하는 게 아니고, 자기편이 아니면 무조건 처음부터 비난하기도 한다. 

다른 사람을 외모로 쉽게 판단하는 문제점을 좀더 생각해 보자. 우리는 외국과 비교해서 외모를 중시하는 경향이 더 크다고 본다. 예를 들어, TV 뉴스 앵커, 특히 기상 캐스터로 나오는 분들이 젊고 미인인 경우가 많다. 외국 일기예보의 경우엔 인상 좋은 중년 남녀 캐스터들이 흔한데, 우리는 거의 예외 없이 젊고 아름다운 여성들이 한다. 왜 그럴까 하는 의문을 몇 년 전 페이스북에 올렸더니, 여러 가지 의견이 댓글로 올라왔다. ‘우리 사회는 아직도 남성중심 문화가 강해서 여성은 실력보다 외모를 더 중시한다, 다양성보다 획일성이 강조되고 내용보다 겉모습을 중시하기 때문에 외모를 기준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경향이 높다, 우리는 성격이 급해서 첫 인상으로 결론을 내리려는 풍토가 있다…’ 등이다. 어떤 설명이 더 사실에 부합하든 간에 이처럼 외모에 기초한 성급한 판단 경향은 달라지고 있다고 본다. 무엇보다도 우리 사회에서 성평등에 대한 인식이 높아지고 ‘빨리빨리’ 문화도 바뀌고 있기 때문이다. 

궁극적으로 ‘쉽게 판단하는 사회’의 문제점을 보정하려면 모든 사람의 자유와 평등을 존중하는 인권적 접근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민주주의가 발달한다고 해서 반드시 개인의 인권이 제대로 보장되는 것이 아니다. 

예를 들자면, 코로나 사태로 방역을 강화할 때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과 공중보건의 필요성 사이에서 우리는 서구 국가들처럼 고민하지 않은 것 같다. 또한, 법적으로 문제가 없는 일에 있어서도 다수의 여론을 바탕으로 소위 ‘사회의 지탄’을 받는 경우도 아직 많은 게 사실이다. 

다양성이 존중되지 않고 획일주의가 우세하면, 특히 사회적 약자들은 차별과 편견에 시달리기 쉬워진다. SNS 등으로 집단적 판단이 쉬워진 상황에서 자신의 입장을 제대로 제시하지 못하는 약자들은 섣부른 판단과 낙인찍기의 희생양이 되는 것이다. 몇 년 전 우리나라에 중동 난민들이 왔을 때 이슬람 신자들은 각종 범죄를 저지르기 쉬우므로 수용하면 안 된다는 주장을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다. 사람을 인종, 성별, 연령, 장애와 같은 신체적 특성으로 구분하지 말고, 누구나 다 인간이라는 공통점에 따라 평등하게 대하자는 것이 인권의 요체다. 우리 사회의 다음 세대가 그러한 인권 의식을 갖고 성장하여 다른 사람을 쉽게 판단하지 않고 열린 마음으로 대하도록 할 필요가 있다. 잊기 쉬운 시대적 과제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