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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9호 2022년 4월] 기고 에세이

추억의 창: 함춘원의 봄날

백성기 수필가·한신모방 대표

함춘원의 봄날



백성기
약학59-63
수필가·한신모방 대표


순수하고 뜨거웠던 흰 가운 무리
제약 꿈 접었어도 추억은 남아


신입생이던 그해 약학대학이 을지로에서 대학가 부근 함춘원으로 이사했다. 의과대학과 간호대학, 대학병원이 있고 길 건너 창덕궁이 있는 숲이 우거진 함춘원이야말로 의약 본거지가 될 수 있는 매우 좋은 장소였다. 거기다 문리대가 있는 대학본부까지 이웃에 있으니 참 좋은 환경이 되었다. 봄가을의 경치가 보통이 아니었다.

대학 초년생이던 우리는 흰 가운을 입고 화학실험실에서 배우곤 했다. 화학실험 중 급성맹장염이라 급히 대학병원에 입원해 수술을 받기도 했다. 4·19 의거를 맞이했을 때, 광화문에 가운 입고 나갔던 무리가 바로 약대생인 우리였다. 얼마 지나 5·16도 겪었다. 초년생부터 소모임으로 농촌 계몽 활동을 했던 우린 여름방학이면 양산군 배내골까지 짐을 지고 갔다. 경남 밀양에서 가까운 원동역에서 내려 고개를 넘어 골짜기로 내려가 봉사활동을 했다. 우리가 잘살려면 부업을 해야 한다면서 약초 재배를 소개했고, 동네 변소를 소독했다. 아이들에게 구충제를 주고 노래를 가르치고, 저녁에는 어른들에게 재배 기술을 소개했다. 나는 시골 학교 오르간으로 반주를 하면서 노래를 가르쳤다. 지금의 배내골은 펜션 집단의 휴양지로 바뀌었다. 김형석 교수와 함석헌 선생 등을 초빙하여 강의를 듣기도 하고, 세상 이야기로 날 샐 줄 모르던 때였다.

연말 크리스마스 때가 오면 기독 학생들이 합창 음악회를 열었다. 그때 합창반주도 내가 봉사했다. 참 신기로운 일 하나, 완전 초짜가 그때 한 번 바이올린으로 타이스의 명상곡을 연주했었다. 가까운 레슨 선생님에게 부탁해서 한 달 동안 집중적으로 이 곡을 연주할 수 있도록 레슨을 받았던 것이다. 생각만 해도 웃음이 나오는 일이다.

여러 동료들의 지원으로 약대학생회장에 도전해 학생회장이 됐다. 4·19 이후 재건운동으로 학생회를 재건학생회라 하라고 해서 학생과 충돌이 있었다. 군사혁명으로 모임에 제재를 받다 보니 대의원구성도 어렵게 되어, 학생회장들로 총학생회를 운영하기로 하고 열두 단과대학 학생회장이 돌아가며 총학생회장을 맡기로 했다. 나는 총학생회 학예부장을 맡아 서울대 장기놀이 대회를 주관했고, 10월 총학생회장으로 대외 업무를 했다. 고대 석탑제에 대표로 가서 축사도 했다. 한 번은 한미 행정협정에 미흡한 부분을 보강하라고 데모하다가 동대문경찰서에 끌려가 하루를 유치장에서 보냈다. ‘빈대 유치장’이라고 했다. 의자가 듬성듬성한 나무로 뚝딱 만든 임시의자 같은 것인데, 앉아 있으면 허벅지 사이로 빈대가 물었다. 어찌나 가렵던지 혼났다. 빈대는 천장까지 올라가서 우리 몸에 떨어져 뜯어먹는 습성이 있다고 했다.



일러스트 김나은(디자인 4학년) 재학생


제약은 내 오랜 꿈이었다. 졸업 후 공군 장교 시험을 쳐서 합격해 대전항공병학교에 입소해 훈련을 받고 공군장교로 근무하게 됐다. 졸업 당시 채동규 학장님이 불러 갔더니 ○○제약회사에 가겠느냐고 물었다. 이미 공군 장교 시험에 합격했던 터라 대답할 수가 없었다. 제약회사 입사가 큰 목표였던 나의 가는 길에 군 복무가 제약이었다. 마침 공군본부 의무감실 약사들은 거의 선배들이 잡고 있었다. 선배님들이 나를 공군본부로 불러 새까만 소위가 ‘별’들과 ‘말똥’만 있는 공군본부에 출퇴근 근무를 했다. 집에서 빨리 결혼하라고 해서 김해 공항 공군비행학교 의무대대에 있으면서 결혼도 하고 가업을 도왔다.

중학교 입학하던 1953년, 집에서 예기치 않던 표백사업을 하게 됐는데 사업명이 백흥화학공업사였다. 사업을 맡으려면 의사로서는 불가능할 것 같았다. 고교 화학시간 아스피린 제조 과정에 대해 배우고 의과대학이 아니라 약학대학으로 가서 제약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굳혔다. 선친의 사업 부도와 몇 번의 고비를 넘기며 제약의 꿈을 접고 팔순에 이르렀다. 아들 둘, 딸 둘, 손주 12명의 큰 가족을 이뤘다. 아이들이 잘 지내고 있으니, 함춘원의 봄날이 무의미하지는 않았다.



*백 동문은 부산패션칼라산업협동조합 이사장, 한신모방 대표회장을 역임했다. ‘새시대문학’ 수필 신인상을 수상하고 부산문인협회 회원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수필집 ‘호랑이 굴’을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