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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9호 2022년 4월] 기고 에세이

[나와 4·19 혁명] 5·16민족상은 요란했는데 4·19혁명상은 없었지

구월환 전 연합뉴스 상무·전 세계일보 주필

5·16민족상은 요란했는데 4·19혁명상은 없었지


구월환
사회60-67
전 연합뉴스 상무·전 세계일보 주필


어깨 겯고 종로거리 내달린 그날
거친 세파에 그 에너지 잃었어도
불의에 항거한 DNA는 우리 안에


4·19. 그날은 다시 왔지만 왜 씁쓸해지지? 금년이 62주년인가. 벌써 그렇게 되었나. 한참을 더듬어도 답이 나오지 않네. 세월이 빠르긴 하네.

그날은 우리 1학년 첫 수업시간이었지. 이만갑 교수의 사회학개론이 막 시작됐는데 창밖에서 깃발을 흔들며 빨리 나오라고 재촉하는 고함소리가 유리창을 때렸지. 우리 신입생들은 선배들의 고함소리에 일순 어리둥절했지만 곧 너도나도 말없이 책가방을 챙겨 나왔지. 시국을 알기에는 어렸지만 이심전심이었어.

교수님도 상기된 표정으로 그냥 바라보기만 했지. 동숭동 캠퍼스가 온통 긴장한 가운데, 여기저기서 3·15부정선거 규탄의 외침이 귀창을 때리고 라일락 향기 그득한 동숭동 캠퍼스는 달아오르기 시작했어. 우리는 누가 뭐랄것도 없이 중앙도서관2층 조교실에 책가방을 던져놓고 우루루 몰려나갔지. 정문을 나서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득달같이 달려든 경찰들한테 박달나무 방망이 세례를 당했지. 정말 무지막지하게 때렸어. 밀고 밀리고 맞고 소리지르고... 상황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됐어.

급한 김에 학교 앞 개울로 뛰어들었지만 다시 법대쪽으로 기어올라가 인근 공사장 벽돌과 돌멩이로 대항했지. 금새 우리 문리대생과 법대 의대생에다 인근 고교생까지 합세해 거대한 군단이 되었어. 우리 20대 젊은이들의 성난 파도 앞에 경찰 저지선은 여지없이 무너졌지. '의쌰의쌰'하며 어깨동무를 하고 헐떡거리며 파죽지세로 종로까지 내달렸지. 종로2가 화신백화점 앞에 이르자 경찰들이 새까맣게 저지선을 치고 있었지. 겁이 덜컥 나데. 모두 자리에 주저앉아 연좌시위 모드로 버티고 있었는데 별안간 탕탕하는 소리와 함께 희뿌연 연기가 우리 대열을 뒤덮었어. 처음 보는 최루탄 공격이었어.

그 독가스, 정말 지독하더만. 순식간에 눈물 콧물이 쏟아지고 땀으로 범벅된 온몸이 쓰리고 따가워 견딜수 없었네. 금방 기절할 지경이었어. 어느새 구두도 벗겨져 맨발이었고 애지중지한 새 교복은 엉망이 되고 바지는 무릎에 구멍까지 나버렸다네. 언제 다쳤는지 무릎은 퉁퉁 부어올랐어. (지금 같았으면 무슨무슨 유공자가 되었을지도 몰라ㅎㅎ) 나는 쩔뚝거리며 엉금엉금 기다시피 하여 가까운 2층 다방으로 들어가 체면불고하고 바닥에 널부러졌어. 다방 종업원(그땐 레지라고 불렀지)들이 물수건을 건네주며 학생들 수고한다고 칭찬하더군. 그들은 단연 우리편이었고 그것이 확실한 민심이었어. 그날 광화문을 거쳐 경무대까지 진출한 동료들, 정말 존경스럽고 용감한 동료들이 경찰의 총탄에 쓰러졌지. 백명도 넘었으니 어떻게 말로 하겠나.

이어서 며칠후 대학 교수님들이 '학생의 피에 보답하라'는 플래카드를 높이 들고 서울도심 거리에 진출하면서 분위기는 절정에 이르고 85세 노(老)대통령의 하야로, 의거로, 혁명으로 숨가쁘게 번져갔지. 비상한 관심속에 4월26일, 드디어 이승만대통령 하야성명이 라디오에서 흘러나왔지. 그의 떨리는 목소리가 지금도 귓전에 울리는 듯 하네. "국민이 원한다면 물러날 것이며.." 선거도 다시 하겠다고 했지. 조지 워싱턴처럼 8년만 하고 물러났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천추의 한을 남겼어.

어느 사이에 우리 학도들은 일약, 시대의 최강자가 되어 잠시나마 경찰이 사라진 서울거리의 질서유지까지 맡았었지. 나도 총학생회의 지시에 따라 서울역에 나가 서툰 솜씨로 '오라이 스톱'해가며 교통정리를 했다네. 그러나 시끌하던 캠퍼스도 점차 가라앉고 우리는 다시 강의실로 돌아왔지. 혁명의 사자(獅子)들이 물러가자 권력은 야당에게 넘어갔고 지겨운 싸움질이 시작되었지. 정말 한 조각의 양보도 찾아볼수 없었던 민주당 정치인들의 행태라니! 학생 사자가 물러가자 정치 사자인지 하이에나인지 우루루 몰려들어 권력이란 먹잇감을 인정사정없이 물어뜯더군. 살기는 어렵고 데모는 쉴 날이 없었지. 가정주부들은 물론 국민학교 어린 아이들까지 데모를 한다고 몰려나왔으니까.

그해 여름방학 때는 각 시군별로 향토계몽대란 것을 만들어 내려갔는데 주로 장터를 돌며 연설을 했지. 자유당 정권의 독재와 부정선거 때문에 우리 청년학생들이 피를 흘렸다며 연일 성토하느라고 목이 쉬었지. 우리 고향에도 문리대 수학과에 다니던 선배가 희생되어 집에 조문도 갔었지. 그때 우리 서천군 계몽봉사대 멤버는 6명이었는데 보름 넘게 합숙하면서 형제간처럼 정이 들었지. 하지만 해단식을 한 후에는 같이 만나지 못했어. 너무 열심히들 사느라고 그랬나. 그땐 그랬어.

응당, 존중받아야 할 4·19혁명은 곧 시들기 시작했어. 우리 캠퍼스의 라일락처럼. 바로 그 옆의 마로니에는 지금까지도 잘 버티고 있던데 말이야. 혁명정신은 어디로 가고 시국은 뒤숭숭, 물고 뜯는 정치가 가관이더니 급기야 일이 터졌지. 1년이 겨우 지난 5월16일, 자고 일어나니 세상이 달라졌어.  외국에서만 있는 줄 알았던 쿠데타란 것이 바로 우리 눈앞에서 벌어지다니. 그러나 그때 우리 학교에서도 대놓고 반대하는 사람은 별로 없었던 거 같아. 군인들이라 무섭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럴만도 하지, 너무 무질서했어, 누군가는 질서를 잡아야 해'...그런 심정이 아니었나? 흔한 말로 우려 반, 기대 반이었다고 해야하나. 한솥밥을 먹었던 민주당의 윤보선대통령까지 '올 것이 왔다'고 할 정도였으니까. 나중에 본인이 그런 말 한 적이 없다고 하긴 했지만.

하여튼 군정이니 민정이니 엎치락 뒤치락하며 안개정국의 혼란은 계속 이어졌고 거친 세파속에서 4·19의 사자들은 점차 힘이 빠졌어. 지루하고 짜증나는 정치의 시간 속에서 우리의 4·19는 퇴색하여 사자 호랑이에서 토끼 고양이로 바뀌지 않았나. 하긴 아르바이트 한다고 뛰어다니느라 바쁘기도 했지. 그래도 캠퍼스 잔디밭이나 벤치에 모여앉아 나라걱정 많이 했어. 그때는 개똥철학이라고 비아냥 받기도 했지. 1학년때 4·19, 2학년때 5·16을 맞았으니 얼마나 시국이 요동쳤나. 도대체 사방이 뒤숭숭해서 학교에 다닐 기분도 나지 않고 생활도 쪼들렸어. 군대나 갔다오자 하며 공군에 입대했지.

그날 어깨동무를 하고 서울시내를 누비며 시민들의 박수와 환호를 받았던 우리시대의 사자들은 불행이랄까, 뜨거운 가슴이 서로 통하는 동지로 승화하지 못했어. 그냥 각개약진이었어. 4월 19일이 와도 매번 오늘이 그날인가 하며 약간은 쑥스럽기도 하고 무덤덤하게 지나쳤지. 왜 4·19는 역사책 한귀퉁이에만 외롭게 남았나? 자책감이 들기도 했지. 왜 우리는 '아침이슬' 같은 노래를 만들어 소리높이 부르지 못했나.이런저런 이름의 4·19 단체가 있었지만 솔직히 관심 없었지. 오히려 저 사람들이 그때 뭘 하기는 했나하는 생각이 들었어. 하긴 4·19혁명 1년후에 쿠데타를 일으킨 박정희정권이 4·19를 멀리했으니 그 눈치를 보는 사람도 많았겠지. 이해관계가 바뀌고 처자식이 생기면 거룩하던 생각도 흐려지는 게 인지상정 아닌가.

언젠가 한번 내가 연합통신 기자할 때  회사근처 인사동에서 4·19모임이 있다고 해서 나가봤는데 썰렁하더만. 왠지 잘못 온 기분이었어. 바로 자리를 떴지. 한때나마 5.16민족상은 요란했지만 4·19혁명상은 없었어. 사실, 4·19를 갉아먹고 까먹은 건 당시 신구파로 갈라져 피터지게 싸웠던 민주당이었고  곧이어 5·16이 덮쳤으니 질식한 거지. 우리들의 피와 땀으로 맺어진 혁명의 과일은 결국 뺏겼어. 이제와서 누구 탓을 하겠나.

곰곰이 생각해보면 확실한 리더가 없었다는 것도 문제였지 않았나? 만약에 그 뜨겁던 4·19의 열기를 모아 이어갈 수 있었다면 역사는 바뀌지 않았을까? 그렇게 순수하고 정의감에 피가 끓었던 사자들이 정치를 했다면 이렇게까지 되지는 않았겠지. 태풍같은 그 에너지를 왜 쉽게 까먹었냐고? 추사 글씨를 엿장수한테 넘기듯이 말일세. 모두 열심히 살았고 보람도 남겼다지만 자책과 회한이 파도처럼 밀려오네. 내가 너무 늙어서 그런가, 늦어서 그런가....하지만 아직 끝나지는 않았어. 60년도 더 지났다 해도 그때, 스무살 때 우리에게 각인되었던 DNA! 자유와 민주주의, 그리고 가치지향의 정신. 불의를 보고도 못본 척, 지나치지 못하는 그 불굴의 DNA는 아직 숨쉬고 있지 않은가! ‘진리는 나의 빛’이라는 그 각인말야, 벌써 지웠나?(끝)


작년 4월 19일 모교 보직교수들이 관악캠퍼스 내 4·19 추모공원을 찾아 순국 동문에게 헌화했다.